퍼펙트 '고사'한 니퍼트 "1대1이면 내려가지 않았다"

최종수정 2016-06-22 02:12

2016 프로야구 KBO리그 두산베어스와 kt위즈의 경기가 21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렸다. 두산 선발투수 니퍼트가 6회초 2사후 박기혁을 삼진으로 처리하며 이닝을 마치고 있다.
잠실=최문영 기자 deer@sportschosun.com /2016.06.21/

감기 몸살, 점수 차, 일요일 등판. KBO리그 최초로 퍼펙트 투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더스틴 니퍼트(두산 베어스)가 직접 밝힌 이유다.

21일 잠실구장은 술렁였다. 7회초 kt 위즈의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 두산 선발 니퍼트가 아닌 왼손 불펜 이현호가 마운드에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6회까지 니퍼트는 안타도, 볼넷도 내주지 않았다. 77개의 공을 던지면서 삼진 7개를 뽑아내는 환상적인 피칭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대기록까지 아웃카운트 9개를 남기고 이현호에게 바통을 넘겼다. 두산 팬들은 물론 kt 선수들까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애꿎게 김태형 두산 감독만 비난의 표적이 됐다. 대기록이 나올 수 있는데 왜 바꿨냐는 것이다. 각종 추측이 난무했다. 상대를 지나치게 배려하고 있다, 굳이 불펜을 점검하고 있다는 등 근거 없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하지만 경기 후 구단 측이 밝혔듯 니퍼트가 '자진 강판'했다. 두산 관계자는 "니퍼트가 경기 전부터 감기 증세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경기 중반에 접어들며 힘이 점점 빠지는 것을 느껴 교체 요청을 했다"고 했다. 김태형 감독도 "니퍼트가 감기증세에도 완벽한 피칭을 해줬다. 6회 이후 본인이 무리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피력했다"고 설명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날 하루 두산 벤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구단이 니퍼트의 감기 몸살을 인지하고 있던 건 20일(월요일)부터다. 목이 간질간질한 니퍼트는 집 근처 이비인후과를 찾았고 곧장 이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그런데 다음날 증세가 심해졌다. 며칠간 휴식을 취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갈 수록 힘이 빠졌다. 굵직한 목소리도 이미 쉰 터였다.

그래도 오후 3시30분께 잠실구장에 출근했다. 유니폼을 갖춰 입고 선발 등판을 준비했다. 불펜에서 공을 던지며 오후 6시30분을 기다렸다. 결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퍼페트 피칭. 애초 빠른 승부를 펼친다고 마음 먹은 게 투구수 절약, 삼진으로 이어졌다. 77개의 공 중 직구만 54개 뿌렸고 변화구는 체인지업 9개, 슬라이더 9개, 커브 5개를 던졌다. 안타든 범타든 빨리 승부 보자는 의도가 다분한 볼배합이었다.


2016 프로야구 KBO리그 두산베어스와 kt위즈의 경기가 21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렸다. 시즌 10승에 선착한 니퍼트가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잠실=최문영 기자 deer@sportschosun.com /2016.06.21/
그런데 이닝이 진행될수록 몸 상태가 더 나빠졌다. 2-0이던 4회말 야수들이 대거 7점을 뽑으면서 긴장이 풀렸고, 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깨가 식었다. 동시에 몸은 떨리고 있었다. 결국 6회초 투구를 마친 뒤 한용덕 수석코치가 다가오자 속내를 털어놨다. "코칭스태프에서 던지라면 던지겠지만, 오늘은 그만 던지면 안 되겠냐"고. "몸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고 했다.

평소 한용덕 코치는 토종, 외인 가리지 않고 1이닝이 끝난 뒤 무조건 선발의 몸 상태를 체크한다. '나이스 피칭'이라고 독려하기도, '볼배합을 바꾸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한데, 퍼펙트 피칭을 하고 있는 니퍼트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적잖이 당황한 한 코치가 "정말이냐. 지금 퍼펙트 피칭 중이다. 잘 생각해보라. 이런 기회는 또 오지 않는다"고 얘기할 정도다.

그 때 니퍼트가 전광판에 찍힌 점수를 가리켰다. "11-0으로 승부가 기울었으니, 내가 지금 내려가도 팀과 불펜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만약 그렇다면 말해달라. 더 던지겠다"고 덧붙였다. 한 코치는 서둘러 사령탑에게 다가갔다. 니퍼트의 의중,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결정을 기다렸다. 김태형 감독도 한 코치와 마찬가지로 "정말이냐"고 되물은 뒤 "그렇다면 바꾸라"고 지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또 있다. 감기 몸살, 점수 차 외에도 니퍼트 입에서 나온 말이 바로 일요일 등판이다. 니퍼트는 한 코치에게 "만약 더 던질 경우 (다음 선발 일정인) 일요일 등판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앞서 못한 교통 사고, 담 증세로 두 차례 선발 등판을 소화하지 못했는데, 다시 한 번 로테이션을 거르며 팀에 피해를 줄까 걱정했다는 게 두산 관계자의 말이다.

그렇게 7회초 이현호가 마운드에 올랐다. 그렇게 퍼펙트 중인 투수가 대기록의 기회를 고사한 희대(?)의 사건이 발생했다. 통산 3000안타까지 단 1개를 남겨두고 마지막 타석에서 팀을 위해 희생 번트를 댔다는 영화 '미스터 3000'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21일 경기가 끝나자마자 근처 병원을 찾은 니퍼트는 이런 얘기도 했다. "오늘 1-1 동점 상황이었다면 결코 마운드를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더 던졌을 것이다." 이것은 실화다.

함태수 기자 hamts7@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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