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캡틴 애런 저지가 11일(한국시각) 다이킨파크에서 열린 B조 이탈리아와의 최종전을 앞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주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스포츠조선 노재형 기자]야구 역사상 이런 팀은 없었다. 세계 최고의 무대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톱클래스 슈퍼스타들을 끌어모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미국 대표팀을 말함이다.
작년 아메리칸리그 MVP 애런 저지를 비롯해 양 리그 홈런왕 칼 롤리와 카일 슈와버, 현존 최고의 유격수로 평가받는 바비 윗 주니어와 두 차례 MVP 출신 브라이스 하퍼, 이밖에 알렉스 브레그먼, 폴 골드슈미트, 거나 헨더슨, 윌 스미스, 피트 크로-암스트롱, 브라이스 투랑 등 포지션별로 최고의 올스타급 야수들을 모았다.
마운드는 더욱 화려하다. 지난해 양 리그 사이영상 수상자인 태릭 스쿠벌과 폴 스킨스를 기둥으로 삼으면서 로간 웹, 클레이 홈즈, 놀란 맥클린과 같은 정상급 선발투수를 뽑아 로테이션을 완성했다.
메이슨 밀러, 데이비드 베드나와 같은 특급 마무리를 불러 화려한 불펜 진용도 꾸렸다. 여기에 은퇴를 선언한 클레이튼 커쇼를 '정신적 지주'라는 명목으로 모셔왔다. 그런데 조별 라운드를 모두 마친 상황에서 커쇼는 이제 등판할 일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클레이튼 커쇼. AP연합뉴스
2023년 결승서 일본에 패한 미국은, 정확히는 MLB는 이번 대회를 단단히 벼르며 준비했다. 작년 초 마크 데로사 감독이 저지에게 전화를 해 참가를 요청했고, 저지는 기다렸다는 듯 '캡틴' 감투까지 쓰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이어 스킨스와 스쿠벌도 데로사 감독과 뜻을 함께 하겠다며 시즌 내내 최고의 기량을 유지했다.
조별 라운드는 당연히 전승이 목표였다. 그런데 마지막 경기에서 복병 이탈리아에 덜미를 잡혔다. 6회까지 8실점하고 한 점도 내지 못준 미국은 7회부터 추격전에 나섰으나, 결국 6대8로 패했다. 야수들 중 막내격인 크로-암스트롱이 홈런 두 방을 터뜨리며 추격을 주도했지만, 8점차를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마크 데로사 미국 대표팀 감독이 11일(한국시각) 이탈리아전 패배 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YankeeWRLD X 계정 캡처
어이 없는 건 데로사 감독이 경기 전 MLB 네트워크와 인터뷰에서 "이미 8강을 확정했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실제 롤리, 하퍼, 브레그먼, 투랑 등 주전들을 선발라인업에서 대거 제외했다. 선수들도 그렇게 알고 경기를 했을 것인데, 7회가 돼서야 그게 착각이란 걸 깨닫고 부랴부랴 투수 교체와 대타 작전을 단행했다.
데로사 감독은 경기 후 공식 인터뷰에서 "내가 잘못 말했다. 계산한 숫자를 잘못 읽었다"고 해명했다. 말도 안되는 얘기다.
이제 미국은 12일 멕시코와 이탈리아의 B조 마지막 경기 결과에 따라 운명이 갈리게 됐다. 일단 이탈리아가 승리하면 미국은 조 2위로 8강에 진출한다.
하지만 멕시코가 이기면 복잡해진다. 세 팀이 똑같이 3승1패로 동률을 이루기 때문에 세 팀간 경기의 실점률을 따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멕시코가 4득점 이하로 이탈리아를 누르면 미국은 8강 진출이 좌절된다.2006년 1회 WBC부터 한 번도 1라운드서 탈락한 적이 없는 미국이다.
저지는 "이젠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운이 따라줘야 한다. 내일 경기를 지켜보자"고 했다.
프란시스코 서벨리 이탈리아 감독이 11일(한국시각) B조 미국과의 경기에서 8대6으로 승리한 뒤 인터뷰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을 어떻게든 결승까지 밀어붙이려던 MLB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흥행에도 큰 차질이 빚어질 수 있는 위기 상황이다.
WBC 창설을 주도하고 대회 운영을 맡고 있는 MLB는 '야구의 세계화'를 명분으로 WBC 확장을 부르짖고 있지만, 실상은 흥행과 돈벌이에 관심이 더 크다. 그러려면 미국이 결승에 올라 우승까지 차지해야 한다. 이게 WBC를 움직이는 큰 원리라고 보면 된다.
지난 대회에 이어 이번에도 미국은 일본과 결승전 말고는 만나지 않는다. WBC 조직위원회가 대진표를 그렇게 짰다. 세계 야구 '2강'인 두 팀 중 하나라도 조기 탈락하면 팬들의 관심이 크게 떨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들러리로 세운 꼴이다. 재밌는 건 그 어느 나라도 대진표 문제를 항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런 나라들도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중심으로 전력을 꾸렸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WBC는 대회 참가국과 8강, 4강에 든 나라에 대해서는 순위에 따라 상금을 준다. 하지만 돈 때문에 최고의 야구대회에 참가하는 나라는 없다.
태릭 스쿠 벌은 지난 8일(한국시각) 영국전을 마치고 소속팀 디트로이트로 돌아갔다. Imagn Images연합뉴스
미국은 로스터 30명 전원이 메이저리거들이다. 그것도 각 팀의 주전 포지션을 맡고 있는 선수들이다. '패트리어티즘(patriotism)'이 부상을 무릅쓰고 WBC를 뛰어야 할 이유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WBC 따위는 뒷전이다.
이번 대회를 참가하면서 딱 한 경기만 던지기로 계획했던 스쿠벌이 지난 8일 영국전 등판을 마치고는 갑자기 8강 토너먼트에서 한 번 더 던지고 싶다고 하더니 결국 소속팀 캠프로 돌아갔다. 우왕좌왕하며 조별 라운드를 한창 진행 중 미국 대표팀 분위기를 흐렸다.
스쿠벌은 대표팀을 떠나면서 마이애미 론디포파크에서 열리는 준결승과 결승에 미국을 응원하러 가겠다고 했는데, 그럴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