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스포츠조선 정현석 기자]"그동안 저로 인해 (불펜 방화로) 상처를 받았을 선발 투수들께 고개 숙여 사과 드리고 싶습니다."
모두의 웃음이 터졌다.
무려 3191일 만에 선발승을 거둔 투수가 선발 투수들에게 사과하고, 불펜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불펜에서 선발로 전환해 시즌 첫 선발승을 따낸 LG 트윈스 장현식(31)이 주인공.
장현식은 2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전에 올 시즌 두 번째 선발 투수로 등판해 5이닝 동안 67구만을 던지며 3안타 1볼넷 2탈삼진 무실점의 눈부신 호투를 펼쳤다. 최고 148㎞의 묵직한 직구를 중심으로 슬라이더, 커브, 포크볼을 다채롭게 섞어 던지며 삼성 타선을 꽁꽁 묶었다. 팀의 4-3 승리를 이끈 장현식은 올 시즌 첫 선발승이자, NC 다이노스 시절이던 2017년 9월 27일 대구 삼성전(6이닝 1실점) 이후 무려 3191일 만에 선발승을 추가하는 감격을 누렸다.
전문 불펜요원이던 그가 임시 선발 중책을 맡아 완벽한 투구를 선보인 비결에 대해 장현식은 '공격적인 승부'를 꼽았다.
그는 "불펜으로 어려운 상황에 나갈 때는 어떻게든 막으려고 급급했는데, 선발로 나가니 이제는 공을 많이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며 "확실히 공격적으로 투구 템포를 가져간 것이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구속에 연연하기보다 '밸런스'를 잡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그는 "힘으로 윽박지르기보다는 쓸데 없는 힘을 빼고 일정한 밸런스를 계속 유지하자는 생각이 중요하더라"며 "삼성 타자들을 걱정하기보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더 셌다. 요새는 이상하게 한가운데 직구가 제일 잘 먹힌다. 속으로 '몰라, 그냥 쳐 봐'라는 생각으로 던지는데 결과가 좋다. 생각의 차이인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사실 그의 선발 연착륙은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난 6월 5일 NC전(4이닝 무실점)을 시작으로 4경기 연속 호투행진. 4경기 중 3경기가 무실점. 18⅓이닝 동안 단 2실점(0.98)이 전부다.
'선발 전환을 예감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선발이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어떤 상황에 나가든 투수로서 내 피칭의 가치를 팬분들과 팀에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먹고 나서부터 공격적으로 던지게 됐고 결과도 계속 좋아졌다"라며 한층 성숙해진 야구관을 전했다.
이날 장현식은 투구 수 67구에 불과했으나 5회를 무실점으로 마치고 깔끔하게 마운드를 내려왔다.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그는 "5이닝이 어디냐"라고 반문하며 "개인적으로 5이닝 무실점을 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5회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잡히는 순간 그냥 너무 기쁘고 만족스러웠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오랜만에 선발 투수로서 불펜진이 자신의 승리를 지켜주는 모습을 더그아웃에서 지켜본 소감은 어땠을까.
장현식은 질문이 나오자마자 과거 자신 때문에 승리를 날렸을 선발 투수들을 떠올리며 사과를 건네 인터뷰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선발 투수도 진짜 대단하고 힘든 직업이지만, 뒤를 책임지는 불펜은 정말 더 위대하고 대단한 것 같다"면서 "나중에 다시 불펜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오늘 선발 때처럼 도망가지 않고 공격적으로 던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이번 선발전환을 통한 깨우침을 털어놓았다.
마지막으로 9회초 1사 만루 위기를 연속 삼진으로 지워내며 자신의 선발승을 지켜준 마무리 손주영에 대한 고마움과 극찬도 빼놓지 않았다. 장현식은 "그 상황을 막아낸 (손)주영이는 진짜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안 나온다. 역시 야구는 잘하는 사람이 잘하는 것 같다"며 '어나더 클래스' 후배 투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시즌 전까지만해도 '손주영 선발, 장현식 마무리 후보'가 너무나도 당연했던 두 투수.
개막 후 석달 만에 정반대 그림이 현실이 됐다. 이제는 장현식이 선발, 손주영이 마무리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