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조선 조민정 기자]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대표작 '헤다 가블러'가 13년 만에 다시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지난 2012년 전회차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대한민국연극대상과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을 휩쓴 이혜영이 다시 '헤다'로 돌아왔고 초연을 함께했던 박정희 연출도 다시 연출을 맡았다.
'헤다 가블러'는 남편 테스만의 성 대신 아버지의 성인 '가블러'를 쓰며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여주인공 헤다를 중심으로 자유에 대한 갈망과 억압 속에서의 파괴적 충동을 그린 입센의 명작이다. 박정희 연출은 "헤다는 디오니소스를 경험한 인물"이라며 "삶의 썩은 만찬에서 벗어나기 위한 파괴, 그리고 창조로 나아가는 존재"라고 해석했다. 무대 위에서 관객과 인물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장면은 그런 상징의 극대화라고도 설명했다.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혜영은 헤다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저는 '이만희 감독의 딸'이라는 정체성과 헤다의 가블러 장군의 딸이라는 정체성을 연결짓지는 않았다. 오로지 무대 위 감정과 약속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헤다의 결혼 선택에 대해서는 "애정은 없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강한 생존 욕망이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
박정희 연출은 "이번엔 헤다를 '신이 되려는 여자'가 아닌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표현했다. 무대가 배우들의 나이를 모르게 만드는 마법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혜영도 "연습 때부터 공연처럼 임했다. 후배들이 나를 믿고 따라올 수 있게 헤다로서 신뢰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헤다의 파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혜영은 "관객 없이 완성되는 연극은 없다. 매번 새로운 관객들과 함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간다"며 "젊은 관객들에게 클래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혜영과 박정희 연출이 다시 꺼내 든 '총구'는 단지 죽음을 향하지 않는다. 그 총구는 인간의 본질, 자유의지, 창조의 가능성이라는 무형의 목표를 겨누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려낸 '21세기 헤다'는 단지 여성의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고 시대의 갈등과 욕망을 껴안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여전히 현재를 겨냥하고 있다.
국립극단 연극 '헤다 가블러'는 오는 6월 1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조민정 기자 mj.ch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