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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honey] 격동의 근현대사 짊어진 여의도공원

기사입력 2025-07-09 08:21

하늘에서 본 여의도공원 일대 [사진/임헌정 기자]
여의도공원 전경 [사진/임헌정 기자]
소풍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 [사진/임헌정 기자]
공원 연못에 핀 연꽃 [사진/임헌정 기자]
광장인 '문화의 마당'에 전시된 C-47 수송기 [사진/임헌정 기자]
여의도 비행장(1960년)과 비행기(1957년) [국가기록원 제공]
계류식 가스 기구인 '서울달'과 여의도공원 [사진/임헌정 기자]
1994년 여의도광장에서 자전거 타는 시민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97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노동법·안기부법 재개정 촉구 집회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달과 여의도 빌딩 숲 [사진/임헌정 기자]
세종대왕 동상 [사진/임헌정 기자]
공원 내 연못인 '지당'과 정자 '사모정' [사진/임헌정 기자]
서울정원박람회 수상작 '소풍 색감' [사진/임헌정 기자]
'어린왕자' 블록 조형물 [사진/임헌정 기자]
국내 최초의 비행장에서 국가·시민 광장 거쳐 공원으로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1968년 박춘석이 작곡하고 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종점'이라는 노래에는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라는 가사가 나온다.

여의도에 비행장이 있었음을 당시의 대중가요가 고증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마포가 종점이라니. 무슨 종점일까.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운행하던 서울전차의 서남쪽 종점이 마포였다.

이 곡의 첫 구절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를 보면 의미가 드러난다. 마포가 종점이었고 강 건너편 전차도 가지 않던 모래섬이 바로 여의도였다.

이후 반세기 동안 여의도는 서울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게 된다.

◇ 빌딩 숲을 가린 진짜 숲

여의도공원을 탐방하는 날. 설렘이 앞섰다. 공원이 된 이후 제대로 가본 기억이 없다. 옛 기억은 떠올릴 수 있을까.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역에 내려 10분쯤 걸으니 공원의 동쪽 입구가 나타났다.

밖에서 본 공원은 6월의 푸른 신록이 주변을 감싼 숲이었다.

일단 남쪽(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자연생태의 숲'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공원 바깥쪽 둘레길은 중앙 화단을 경계로 두 개의 길이 나 있는데 하나는 보행자길, 하나는 자전거길인 듯했다.

길 양쪽으로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심겨 있고 그 이름을 일일이 팻말로 붙여놓았다.

부처꽃, 꿩의비름, 수크령, 라임라이트, 원추리, 노랑말채, 실버셉터사초, 무늬호스타, 휴케라, 낙상홍, 홍자단, 마가목, 라너스덜꿩나무, 붉나무, 복자기, 졸참나무, 괴불나무, 무늬둥굴레, 비비추, 황금조팝….

내가 아는 식물은 몇 개나 될까. 다채로운 식생군이 도열한 숲은 한가운데로 들어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고즈넉한 연못 위엔 꽃 피기만을 기다리는 수련이 두둥실 물과 뭍의 경계를 흐려놓는다.

곳곳에 현장 학습 나온 유치원생들의 조잘대는 목소리가 나뭇잎 사이로 떠다닌다.

진짜 숲이 빌딩 숲을 가린 하늘을 보는 순간 잠시 여기가 여의도임을 잊는다.

공원의 남쪽을 돌아 북쪽을 향해 올라가니 너른 광장이 나온다. '문화의 마당'이라 부르는 곳이다. 그리고 그 광장 한쪽에 비행기 한 대가 덩그러니 서 있다.

◇ 작전명 '독수리'

비행기는 미군 소속 C-47 수송기다.

1945년 8월 18일 새벽 중국 시안비행장에서 출발한 이 비행기에는 한국 광복군 특공대원인 이범석, 노능서, 장준하, 김준엽과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군 특공대원인 함용준, 정운수, 서상복 등 모두 7명이 타고 있었다.

작전명은 '독수리'. 3일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국내에 들어와 일본과 전투를 벌이지 못했기 때문에 승전국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래서 광복군의 이름으로 여의도 비행장에 내려 무장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겠다는 계획이었다.

오후에 수송기가 여의도에 착륙했고 광복군 4명은 전투태세에 들어갔지만, 함께 온 미군 책임자가 만류했다.

미군의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한국에 있는 미군 포로의 안전을 확인하고 광복 후 한국 상황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날 밤 일본군 장교 2명이 광복군 4명을 찾아와 항복의 뜻으로 술을 따라줬다고 한다.

서울시는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C-47 수송기를 찾아내 당시 비행기가 착륙한 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에 비행기를 전시하고 이같은 역사의 한 장면을 안내판에 기록하고 있다.

◇ 국내 최초의 비행장

여의도에 비행장이 처음 생긴 건 1916년이다. 서울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고립된 섬이라는 입지 조건을 이용해 간이비행장을 만들었다.

1927년 정식 비행장이 됐고 1929년부터는 일본 후쿠오카∼중국 다롄 노선의 중간 기항지가 됐다.

그러나 여의도비행장은 홍수 때 상습적으로 침수됐고, 활주로 길이도 짧아 비행기 대형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대안으로 1930년대 후반 김포비행장이 조성됐다.

그럼에도 민간 공항 기능은 1961년에야 완전히 이전됐고, 1970년 남은 공군기지마저 성남으로 이전하면서 여의도비행장 시대는 막을 내렸다.

◇ 광장의 기억

수송기가 있는 '문화의 마당' 한쪽에 자전거, 인라인, S보드 등을 대여해주는 점포가 있다.

옛 여의도 광장의 축소판인 이 작은 광장에서 학생들이 자전거와 인라인을 빌려 타고 있었다.

불현듯 '광장의 기억'이 소환됐다. 비행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소수이겠지만, 광장은 여전히 생생하다.

1970년 당시 대통령은 여의도 중앙부에 대광장 조성을 지시했다.

처음에는 미국 워싱턴을 모델로 삼아 화단과 녹지가 적절히 배합된 공원형 광장이 계획됐으나, 청와대는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이나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비견할 만한 대형 광장을 주문했다.


그해 9월 완공된 광장에는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날짜가 붙어 5·16광장이 됐다.

광장은 반공·안보 관련 대규모 군중집회, 군사 퍼레이드, 국군의 날 행사 등이 열리는 장소가 됐다.

군사정권이 지속된 1980년대 들어 이름만 여의도광장으로 바뀌었을 뿐 공원의 기능은 변함이 없었다.

북한의 위장평화공세를 규탄하는 방첩 및 승공 국민 총궐기대회(1972), 6·25 반공궐기대회(1974), 총력안보 서울 시민 궐기대회(1975), 북괴 남침 땅굴 규탄 서울 시민 궐기대회(1978), 이웅평 용사 의거환영 및 북괴남침책동 분쇄궐기대회(1983) 등에 100만∼200만명의 군중이 모였다.

자발적인 집결이 아니라 반공연맹 등 관변 단체들이 주도하고 행정력을 이용해 학생, 예비군, 직장인들이 동원됐다.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시민사회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광장은 '국가 광장'이 아니라 '시민의 광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유세를 시작으로 민주교육법 쟁취 전국교사대회(1988), 농산물 개방 반대를 위한 농민대회(1989), 조제권 사수 전국 약사 궐기대회(1993),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 노동자 대회(1996), 날치기 노동 관련 법의 무효화와 재개정을 촉구하는 노동자 대회(1997) 등에 1만∼6만명이 모였다.

국회 옆에 자리한 여의도광장은 '광장 정치'의 새로운 무대가 됐다.

1990년대 들어 광장의 재활용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문민정부 시대가 열리면서 시민을 위한 휴식 공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힘을 얻었다.

다양한 논의가 거듭된 끝에 1997년 공원화 사업이 추진됐고 1999년 광장은 공원이 됐다.

◇ 정오에 뜨는 '서울의 달'

이제 절반쯤 둘러봤다. 아직 절반이 남았다.

공원 한가운데 있는 '잔디마당'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볕바른 길 사이로 푸른 잔디가 심어진 야트막한 언덕이 이어져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걷는 게 공원답지 않아 보인다. 업무차 공원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인 듯했다.

잔디마당 동쪽엔 10m 크기의 세종대왕 동상이 있다. 1999년 공원 개장과 함께 설치됐으니 2009년 세워진 광화문 동상보다 딱 10년 앞서 있다.

잔디마당 서쪽에는 다양한 주제를 담은 작은 정원, 텃밭, 조각작품 등이 천천히 공원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공원의 최북단은 '한국전통의 숲'으로 꾸며져 있다.

'지당연못'이라 부르는 꽤 큰 연못이 있고 '여의정', '사모정'이라는 두 정자도 있다.

꼼꼼히 둘러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북단까지 갔다가 다시 공원 중앙으로 돌아오니 정오가 지났다.

작년 8월 운행을 시작한 계류식 가스기구 '서울의 달'이 어느새 여의도 상공에 떠올랐다. 이제 여의도의 명물은 '광장'도 '공원'도 아니라 '서울의 달'이 될지도 모른다.

◇ 아직 너무 젊다

여의도는 한강에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하중도(河中島)로 홍수만 나면 잠기던 모래섬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양, 염소, 말 등을 기르는 국영 목장이 있었고, 경작이 어려워 이름의 어원을 '너나 가져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척박한 땅이었다.

그러던 섬이 격동의 근현대사를 겪으며 지금은 나라 정치와 금융의 노른자위가 됐으니 그 짧은 시대의 극적인 반전을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지금의 공원이 시민의 휴식처라는 명분만으로 충분한 존재가치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선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할 것 같다.

광장에서 공원으로의 전환에는 여전히 다양한 반론과 담론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비행장과 광장을 거쳐 공원에 이른 현재의 이 장소가 수많은 역사의 순간들과 그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의 기억을 온전히 짊어지고 가기에 아직은 너무 젊은지도 모르겠다.

※ 참고 자료

1. 일제하 여의도비행장의 조성과 항공사업의 양상(염복규, 2020)

2. 광장에서 공원으로: 5·16광장 변천의 공간사회학적 접근(장세훈, 2016)

3. 5·16광장에서 여의도공원으로(한승지, 2023)

4. 5·16광장의 탄생과 소멸의 교훈: 민족의 광장에서 5·16광장 그리고 공원으로(안창모, 2019)

5. 여의도공원 홈페이지(https://parks.seoul.go.kr/template/sub/yeouido.do)

6. 여의도(汝矣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7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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