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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를 바꿔도 같은 낱말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명운이나 운명이나 하지만 존망을 망존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뜻하는 성패도 성패 하지 패성 하지 않고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 불물을 가리지 않는다 않습니다. 희비는 비희로 써도 된다고 사전은 가르치지만 희비 하지 비희 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부부를 내외로도 일컫는데, 그때도 외내 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을뿐더러 익숙하지도 않아서입니다. 전국의 18세 이상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설문했다고 할 때도 남녀라고 주로 씁니다. 여남이라는 쓰임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식주(衣食住) 하지만 영어로는 Food(식) Shelter(주) Clothing(의) 한답니다. 관습이고 습관입니다.
앞뒤 바꿈 문법을 구와 절로 확장합니다. 꾸미는 말과 꾸며지는 말을 뒤바꾸는 겁니다. 꾸미는 말을 술어로 만들어 뒤로 보냅니다. 꾸며지는 말은 주어로 앞에 세우고요. 새빨간 사과 → 사과는 새빨갛다, 어떤가요? 말이 됩니다. 새까만 눈동자의 아가씨 → 아가씨의 눈동자는 새까맣다, 이 또한 말 됩니다. 꾸미는 말은 꾸며지는 말에 대해 '말하는'(술(述)하는) 것이기에 둘을 주술관계로 뒤바꿔놓아도 같은 뜻을 나타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대개 그렇긴 합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예외 없는 규칙이란 없습니다. 말 안 되는 예가 있거든요. 새빨간 거짓말이 대표적입니다. 이것을 거짓말은 새빨갛다 하면 말 안 됩니다. 새까만 후배도 있습니다. 이것을 후배가 새까맣다 하고 쓰고, 기수 차이가 현저하여 보일까말까 한 후배가 선탠으로 살갗이 새까매진 후배로 둔갑하는 참사를 빚습니다. '한미 관세협상 명운걸린 한주'라는 기사 제목을 보았습니다. 한주가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네요. 바꿔봅니다. 이번 주(한주)는 한미 관세협상의 운명이 걸린 주입니다. 이건, 말 됩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1. 새국어소식 통권 제88호 2005.11. 학교문법과 국어 생활, 새빨간 거짓말(2) (이병규 국립국어원) - https://www.korean.go.kr/nkview/nknews/200511/88_7.html
2. 한국일보 매주 목요일: Word Play (재미있는 말), 동서남북 vs. 북남동서 (문화별 방향의 표현) (입력 2014.05.28 18:08)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405281864988564
3. 표준국어대사전(온라인)
4. 네이버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