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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세종대왕 친필을 지역 토호들이 탈취하는 게 가능했을까. 믿기 어려운 사건이 왕조시대에 벌어졌다. 백주대낮에 세종의 어필이 강탈당하고, 권력자가 범죄자를 비호한 사건의 전말을 담은 '세종대왕 어필(御筆) 탈취 사건과 600년수난사'가 출간됐다. 세상에 단 하나로 여겨지는 세종의 친필을 추적한 책의 부제는 '세종대왕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世宗大王 御賜喜雨亭孝寧大君房文)'이다. 11년 동안 세종의 어필을 찾아온 이상주 왕실문화작가가 쓰고 다음생각에서 펴냈다
세종이 써 효령대군에게 선물한 서첩은 우여곡절을 거쳤다. 세종의 어필과 제서(題書)한 정자 희우정은 효령대군이 증손자 주계군 이심원에게 상속했다. 주계군 이심원은 세종 어필을 희우정에 봉안각을 세워 보관했다. 연산군 때 일어난 갑자사화로 이심원 3부자(父子)가 희생되면서 세종 어필과 희우정은 관리에 위기를 맞기도 한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 때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겸양이 다시 조명되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주계군 후손이 미약해졌고, 급기야 순조(1830년) 이후에는 주변의 모리배들이 거짓 소송을 일삼으며 문서를 탈취했다. 이에 후손 이진호가 1인시위와 격쟁을 통해 세종의 어필과 어필을 봉안한 희우정을 되찾게 된다.
기쁨도 잠깐이었다. 영의정 김좌근의 개입 속에 세종의 어필은 탈취한 모리배들의 손아귀에 다시 돌아가고, 원소유자인 이진호는 귀양을 가게 된다. 이는 사회 문제로 비화됐다. 크게 분노한 전국의 유림이 통문(通文)으로 의견을 모으며 나라에 공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또 세종대왕이 실행한 바에 따라 원상 복원조치를 호소했다.
'세종대왕 어필(御筆) 탈취 사건과 600년 수난사'에는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이 세종의 어제(御製) 어필(御筆)임을 보여주는 여러 자료가 제시돼 있다. 효령대군친필전문, 헌종(재위1834~1849년) 때 형조에서 어사희우정문 소유자로부터 받은 글, 철종(재위 1849~1863년) 때 효령대군 종친회에서 쓴 탄원서, 충청도 화양서원 통문, 경상도 상주 흥암서원 통문, 경상도 함창도회 통문, 철종의 격쟁 비답, 철종의 내사완문, 철종이 형조와 한성부에 내린 정부여형한양사게판절목(政府與刑漢兩司揭板節目) 등이다.
이 같은 귀중한 역사자료가 화보로도 구성돼 있다.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御賜喜雨亭孝寧大君房文), 철종의 내사완문(內賜完文), 정부여형한량사게판절목(政府與刑漢兩司揭板節目), 효령대군친필전문(孝寧大君親筆傳文), 고종 7년에 어사희우정문 등을 인쇄한 목활자(木活字) 사진 70여장이다. 이 자료들은 왕과 왕실의 고급문화 감상과 함께 연구자들에게는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11년 동안 세종의 친필을 추적해온 이상주 왕실문화작가의 주요 저서에는 '세종의 공부', '도봉산에 깃든 세종왕자 영해군 500년 이야기', '(중종왕자) 봉성군과 을사사화(번역)',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명문가 독서교육법, '태조와 건원릉', '태종과 헌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