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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때 날씨는 무조건 맑은 게 좋을까.
대만이라면 잿빛 구름이나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제격일 수 있다. 타이베이에 갔는데 비가 내린다면, 가장 '대만적인 것'에 대한 경험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 대만은 중국인가
타이베이에서 첫 목적지는 국립고궁박물원이다.
장제스가 국공내전 당시 베이징 자금성에서 대만으로 가져온 29만점을 포함해 중국 각지에서 옮겨온 70만점 이상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상설전시 외에 3개월 단위로 순환전시하는 유물은 다시 보려면 수십 년을 기다려야 한다.
전시 작품을 다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추정하는 건 난센스다. 어떻게 보느냐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는 관광객은 장제스가 대만으로 가져올 것들을 선별했던 것처럼 골라내야 한다.
고궁박물원이 첫 일정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대만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건 버블티도, 카스테라도, 야시장도 아닌, '대만은 중국인가'라는 물음이고, 그걸 떠올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고궁박물원이 아닐까. 대만은 생각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 비취옥으로 만든 배추
중국인들의 옥에 대한 사랑은 숭배에 가깝다.
완벽(完璧)이라는 말은 원래 완전한 형태의 옥구슬을 뜻했다. 진시황이 고을 열다섯을 주고 바꿔오려고 한 것이 옥이다.
'금은 값이 정해져 있지만, 옥에는 정해진 값이 없다'는 말도 있다. 시경(詩經)에는 '군자를 생각하는 말이 따뜻하기가 옥과 같다'는 표현도 있다.
고궁박물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옥 제품이 있지만, 압권은 취옥백채(翠玉白菜)다.
청나라 광서제의 부인 근비가 결혼할 때 가져왔다는 이 배추 모양의 비취옥은 고궁박물원 최고의 인기 품목이다.
청백함을 의미하는 초록빛과 하얀빛이 배춧잎과 줄기를 타고 너나없이 어우러져 미끄러져 내리니 누구나 만져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북송 시대 보물인 어린아이 모양의 백자 베개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의 옷에 새겨진 희미하고도 정교한 꽃무늬가 놀랍다. 아이의 작은 등짝을 베개로 삼는 중국인들의 해학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옛것을 더 보고 싶은 아쉬움은 서울로 치면 인사동쯤 되는 타이베이 디화제(迪化街)에서 달래기로 했다.
1850년대 조성된 고풍스러운 거리엔 한약재, 건어물, 견과류, 차(茶)를 파는 작은 가계들이 늘어섰다.
길가에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줄지어 있지만, 200년 전 청나라의 정취를 상상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지친 다리를 쉬기 위해 들린 작은 식당에서 맛본 두부 푸딩은 두부와 푸딩이라는 익숙한 단어가 결합한 생소한 음식이었다.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대만의 맛'이라고 생각했다.
◇ 비밀통로의 반전
비밀통로라는 음습한 단어가 투어리즘으로 부활한 것은 자연스럽다.
대만 최초의 5성급 호텔인 타이베이 위앤산(圓山)호텔에 2개의 비밀통로가 있다는 사실이 2015년 처음 공개됐을 때 사람들은 놀라움보다는 오래도록 불행했던 대만의 역사를 떠올렸을 성싶다.
17세기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다시 50년간 일본이 강점했는데, 해방 이후 중국 본토에서 대만에 들어온 외성인(外省人)과 국민당 정부는 1949년부터 1987년까지 대만을 38년간 계엄령으로 철권 통치했다.
1947년 일어난 2.28 반정부 봉기 때는 수만 명이 사망·실종됐다.
위앤산호텔 비밀통로는 장제스 총통과 호텔에 투숙한 요인들의 비상 탈출용이다.
길이 67m, 계단 84개의 동측 통로는 추격을 피하기 위해 구불구불 설계됐고 울퉁불퉁한 벽과 천장은 모든 전파와 소음도 차단한다. 폭파해도 파편이 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비상 상황에서 통로를 사용한 일은 없다.
통로의 끝에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철문을 열면 아름답고 신비로운 비밀정원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 빗속, 원색의 행렬을 보다
타이베이의 동쪽으로 간다. 지룽의 정빈(正濱)항과 허핑다오(和平島) 공원을 목표로 40분쯤 달렸다.
'대만의 베네치아'라는 싱거운 별명이 붙은 정빈항은 실제 보니 베네치아와는 전혀 달랐지만,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품은 어촌이다.
원색의 알록달록한 건물들은 회색빛 하늘을 향해 화려함을 뽐낸다.
최근 카페와 갤러리들이 많아졌다는데 커피 한 잔의 여유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우리 일행이 그 행렬을 본 건 바로 그때다.
허핑다오 공원을 둘러본 뒤 다시 정빈항 앞을 지날 무렵, 원색의 정빈항보다 더 현란한 의상과 깃발, 풍등, 고깔, 가마, 악기를 앞세운 수백명의 마을 주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로를 행진한다.
주민들은 폭죽 터지는 소리, 북과 꽹과리 소리, 나팔 소리에 발맞춰 사자춤을 추며 신명 나게 걸었다.
이 행렬이 매년 음력 6월 15일 전후로 허핑다오 일대에서 열리는 전통 신제(神祭) 행사라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악귀를 쫓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한다고 한다.
무슨 행사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궂은 날씨에도 마을 사람들의 표정은 살아있었다. 뭔가 간절히 바라고, 또 함께한다는 것이 중요한 듯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 시한부 여왕의 화려한 파티
"엘리자베스인가요, 네페르티티인가요?"
지룽 정빈항 북서쪽에 있는 신베이시 예류지질공원. 한때 이곳의 명물 '여왕머리 바위'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닮았는지, 이집트 여왕 네페르티티를 닮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적도 있다.
문제는 엘리자베스이든 네페르티티이든 여왕의 목이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데 있다.
140㎝에 가깝던 여왕머리 바위의 목둘레는 침식과 풍화 작용으로 매년 0.2∼0.5㎝씩 얇아지고 있다. 작년에 125㎝였는데 120㎝ 밑으로 떨어지면 붕괴 위험이 크다고 한다.
정밀 레이저 측정을 해온 공원 측은 2030∼2040년 사이에 목이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왕은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연다.
울긋불긋 화려한 원색의 무늬가 고압적으로 말아 올린 머리와 스카프를 감싸고, 얼굴과 목은 보색 대비의 효과를 극대화한 총천연색 화장술을 뽐낸다.
예류지질공원의 여름밤 석광 야간 페스티벌에 몰려든 전 세계 관광객들의 가장 큰 목적은 여왕 알현이다.
몇 년 후면 영영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여왕의 한밤 화려한 변장쇼에는 여왕과 마지막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여왕 바위가 아니라도 볼거리는 많다.
어둠 속 바닷가 곳곳에서 불쑥불쑥 쏘아대는 현란한 빛은 수천만년 풍상에 제 몸을 온전히 맡겨온 기암(奇巖)의 부끄러운 나신을 순간 포착한다. 빛은 바위에 붙어 그 영겁의 사연을 하나둘씩 벗겨낸다.
흩뿌리는 안개비에 빛은 그 광채를 더하니 바닥은 미끄러워도 눈은 한없이 즐겁다.
2018년 처음 열린 석광 페스티벌은 보통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만 1년에 한 번 열리기 때문에 한밤 여왕 방문은 놓칠 경우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석광 행사를 보지 못해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한낮 예류 공원은 수천만년 비와 바람과 태양이 함께 만든 기괴한 사암의 모든 것을 낱낱이 보여준다.
이날 석광행사 전에 들렀던 지룽 허핑다오공원은 예류지질공원의 축소판이다.
두 곳 다 사암 재질의 암석들이 장관을 이루지만, 규모가 작고 희귀 모양의 바위가 적은 허핑다오공원은 대신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누릴 수 있다.
◇ 기울어 물에 잠기고 있다
지룽 남쪽에 있는 지역이 이란(宜蘭)현이다. 바다와 온천,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이다.
이곳의 란양박물관은 박물관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반나절을 투자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다.
독특하고 압도적인 건물 외관부터 자연과 해양, 환경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알찬 전시물까지 버릴 게 없다. 아이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다.
바다와 숲. 그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 그 절체절명의 미션에 흠뻑 공감하게 된다.
기울어 반쯤 물에 잠긴 듯한 박물관 건물이 시사하는 '문명의 위태로움'은 인사이트가 아니라 직관에 가깝다.
지금은 거의 박제화됐지만 대만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원주민을 빠뜨릴 수 없다.
이란 전통예술단지에서 본 원주민과 한족 요소가 융합한 전통극은 짧지만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극은 뜻밖에도 원주민 청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다. 왜 뜻밖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원주민에게서 보편성보다는 특이성을 찾으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예쁜 공원 같은 예술단지 안에 안개비가 고운 가루처럼 뿌려댔다.
◇ 파인다이닝급 디저트가 기차 안에서 '순삭'
멀베리잼 크루아상, 밀크우롱차 딸기 샌드위치, 남방젓새우가 들어간 데이지 그래놀라, 타로 페이스트를 넣은 훈제오리 번, 석류 샤베트…
고급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나 볼 수 있는 디저트들이다.
지역 해산물을 이용해 만든 신개념 디저트들을 기차 안에서 맛볼 수 있는 '디저트 테마 열차'를 탔다.
기차 이름은 '하이펑'(海風.Sea breeze). 이름에서 보듯 대만의 바닷가를 달리는 관광열차다.
오전 기차는 타이베이 난강(南港)역에서 남동쪽으로 44㎞ 떨어진 이란(宜蘭)역까지 달리고, 오후 기차는 반대로 운행한다.
덥고 습한 7월의 오후. 이란역에서 하이펑 열차를 기다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Sea breeze)은 더위에 지친 승객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플랫폼을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하이펑호(號)를 보는 순간, 에메랄드빛 민트색이 시원한 한줄기 바닷바람처럼 청량감을 준다.
이 날카로운 첫 만남의 여운은 2시간 반 뒤 난강역에 다다를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열차에 올라타니 내부 천장이며, 벽, 의자까지 온통 민트색 일색이다.
승객들은 대형 창문 밖에 펼쳐지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하늘과 바다와 섬과 기차가 한 몸으로 묶인 듯 이어지고 끊어지는 바닷가 절경에 숨죽인다.
열차는 두 번 정차했다. 한번은 이란 앞바다, 해안에서 10㎞ 떨어진 거북 모양의 섬 구이산다오(龜山島)를 보기 위해 다리역에, 또 한번은 고양이 마을로 이름난 허우통(슌)을 둘러보기 위해 허우통역에 각각 섰다.
구이산다오는 이란 주민들이 외지에 갔다가 돌아올 때 저 멀리 섬이 보이면 '이제 집에 다 왔다'고 생각한다는 이 지역의 랜드마크다. 기차가 가도 가도 섬은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탄광촌에 있는 허우통은 원래 원숭이 마을이었다. 허우통이라는 이름은 원숭이 동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샌가 원숭이 대신 고양이가 마을을 가득 채웠다.
2013년 CNN 세계 6대 고양이 마을로 선정된 이곳에선 어딜 가도 고양이들을 만난다. 계단과 지붕 위에도, 다리 밑에도, 상점 문 앞에도, 눕거나, 자거나, 졸거나, 아주 가끔 걸어 다니는 고양이들과 마주친다.
허우통역에서 난강역으로 향하는 중 나오는 디저트는 역시나 민트색 박스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 같다. '이걸 먹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한번 입에 넣는 순간, 고민은 사라진다. 박스에 든 6종류의 디저트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다.
◇ '아시아의 고아'
마지막 날 붉은 색 2층 관광버스 안에서 타이베이 도심을 주차간산(走車看山)했다.
대만에서의 마지막 식사 장소는 타이베이에서 가장 높은 타이베이101 빌딩 지하에 있는 딘타이펑 본점이었다.
원조 샤오룽바오(小籠包)를 먹으며 다시 생각한다. '대만은 중국인가'라는 물음은 정답이 없다.
'대만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도 답하기 쉽지 않다. 원주민인가, 내성인(內省人,명·청 시기부터 이주해온 한족)인가, 외성인인가.
중국 대륙의 역사를 대만 역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과 수용하려는 세력의 갈등은 첨예하다. 그러면서도 사실상 대만과 중국은 자유롭게 왕래한다.
타이베이의 하늘처럼 대만이라는 공간은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가득하다.
1946년 첫 출판된 우줘류(吳濁流)의 장편소설 제목 '아시아의 고아'가 대만에는 여전히 유효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대만은 아시아의 그 어느 곳보다도 역동적이며 생동감이 넘친다. 불확실성이 큰 만큼 가능성도 크다.
시장에서, 식당에서, 사찰에서, 길거리에서도 대만인들의 그 생생한 표정을 읽을 수 있다.
(더 볼거리)
▲ 스린(士林) 야시장
타이베이 최대 규모의 관광야시장. 오후 4시부터 자정까지 문을 연다.
싸고 맛있는 음식을 실컷 맛볼 수 있다. 먹거리뿐 아니라 다양한 게임장과 브랜드 상점도 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가야 하는 곳이다.
▲ 카발란(Kavalan) 양조장
고급 위스키가 스코틀랜드에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카발란은 박찬욱 감독과 BTS RM이 즐겨 마시는 위스키로 이미 유명세를 탔다.
이란현에 있는 카발란 양조장에 가면 카발란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시음과 할인가격에 구매도 가능하다.
▲ 이란현 뤄동(羅東) 임업문화원구
임업단지가 왜 관광지인지 의심스럽다면 일단 한번 가보자. 생각이 달라진다.
산림 철도와 오래된 역이 레트로 분위기를 돋우고 생태 연못과 숲길도 근사하다.
인근 타이핑산 삼림 농장의 목재 수송센터였던 이곳은 일제의 첫 식민지였던 대만 수탈의 현장이기도 하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