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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전주월드컵경기장 애칭)에 웃음이 사라졌다.
분노보다 더 큰 응원 '미워도 내 가족'
'이철근, 최강희. 죽을 힘을 다해 끝까지 함께 하라.'
하지만 회초리까지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MGB는 경기 시작 전 선수들이 입장하자 '우리가 원하는 책임은 사퇴가 아니다', '선수들의 땀방울에 값을 매길순 없다', '주는놈, 받는놈, 모르는 척 하는 놈', '관행 속에 싹트는 리그 몰락', '당신의 양심에 레드카드', '철저한 진상조사! 원인규명!', '누굴 위한 리스펙트슌', '관행을 끊어야 모두가 산다', '응답하라, 노답연맹' 등 날선 문구들이 담긴 걸개를 펼쳐 보이면서 전북 구단 뿐만 아니라 심판진, 프로축구 관계자 전체의 자성을 촉구했다. '그래도 사랑한다 전북'이라는 녹색 글귀도 빠지지 않았다.
전북 팬들이 지난 한 주간 겪었던 상실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일부 팬들은 시즌권을 반납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분노와 절규가 응원으로 바뀌는데까지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전북 팬들은 24일 멜버른전에서 선수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흔들리는 선수단을 다잡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펼쳤다. '심판매수 의혹'에 한대 접속폭주로 마비됐던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끝까지 함께 간다', '우후지실(雨後地實·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등 격려의 글이 쇄도했다. 한 팬은 '축구를 통해 주말마다 가족들이 갈 곳이 생겼다. 감독님과 선수들이 헌신하는 전북팀이 우리 고장에 있다는 게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늘 전북팀을 응원하겠다'고 지지를 다짐하기도 했다. 상주전을 관전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한 팬은 취재진들을 향해 "제발 전북 관련 소식 좀 잘 전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볼멘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날 경기장에는 1만6655명의 팬들이 입장했다. 팬들에게 전북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내 가족'같은 팀이었다.
역전드라마로 쏜 희망
경기 전 만난 최 감독의 얼굴은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멜버른전을 마친 뒤 사임을 암시하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그는 여전히 선수단을 지키고 있다. 표류하는 팀을 정상화 시키는 것 역시 자신이 해야할 임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전북 구단 관계자는 "감독님이 매일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귀뜸했다.
이날 MGB가 내건 걸개 사진을 본 최 감독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약체로 설움 받던 전북이라는 팀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누구보다 기뻐했던 팬들이다. 한 순간에 자부심을 잃게 된 게 너무 안타깝고 죄송스럽다." 최 감독은 "백마디 말 보다 팬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야 팬들이 입은 상처가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흔들리던 선수단의 노력은 눈물겹다. 멜버른전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해줬던 팬들의 사랑을 반전 의지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최 감독은 "사실 선수단 분위기가 정상은 아니다"며 "소식을 접한 뒤 선수들이 스스로 잊으려는 듯 평소보다 분위기를 밝게 하려 애 쓰는게 보인다. 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그는 "멜버른전에서 팬들의 응원에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선수들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는 게 최선이라는 점을 느낀 듯 하다"고 짚었다. 최 감독은 지난 멜버른전에 나섰던 이동국 등 선발 멤버 11명을 상주전에 그대로 투입했다.
분위기는 경기력에 그대로 투영된 듯 했다. 전반 내내 활로를 찾지 못한 채 고전하던 전북은 후반 2분과 8분 잇달아 실점하며 시즌 첫 패배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후반 19분 레오나르도의 그림같은 오른발 중거리포에 이어 후반 23분에는 첫 실점의 원인을 제공했던 최규백이 헤딩골을 터뜨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이어 후반 36분에는 로페즈가 양동원의 키를 넘기는 오른발 골을 터뜨리며 펠레스코어 역전승을 완성시켰다. 동점골에도 차분하던 관중석에는 전북 팬들의 '오오렐레' 골 세리머니와 로페즈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로 가득찼다.
이날 경기 전까지 클래식 무패를 달리던 전북은 무패행진을 11경기(7승4무)로 늘렸다. 또 승점 25가 되면서 이날 전남과 1대1로 비긴 FC서울(승점 23)을 제치고 클래식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분노와 좌절의 눈물을 닦은 전북 팬들이 외친 '전북이여 영원하라'는 구호가 전주성에 짠한 울림을 던진 날이었다.
전주=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