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의 발품스토리]패배에도 카디프 가득 채운 '웨에일~스' 함성소리

기사입력 2016-06-17 09:30


웨일스팬들. 카디프(영국)=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

[카디프(영국)=이건 스포츠조선닷컴 기자]"웨에일~스! 웨에일~스"

처절한 외침이었다. 몸은 이미 비에 흠뻑 젖었다. 신발은 진흙으로 엉망진창이 됐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큰 목소리로 "웨일스"를 외치고 또 외쳤다. 약 500㎞ 떨어진 프랑스 랑스까지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랐다. 적들을 물리치고 승전보를 전해주길 바랐다.

적의 심장에 칼을 박아라

16일 영국 웨일스의 중심지 카디프로 향했다. 런던 패딩턴역에서 기차로 약 2시간 정도 걸려 도착했다. 이날은 웨일스가 잉글랜드와 유로 2016 B조 2차전을 펼치는 날이었다.

웨일스는 13세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정복당했다. 15세기 초 잠시동안 독립을 쟁취하디고 했다. 1536년 잉글랜드의 헨리8세가 제정한 웨일스 법에 의해 완전히 합병됐다. 잉글랜드의 왕세자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웨일스공이다.

그럼에도 300만 웨일스인들은 자긍심을 버리지 않았다. 웨일스어를 지켜나왔다. 1967년 웨일스어는 공용어로 인정받았다. 1999년 자치의회까지 출범했다. 온전한 자치 정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위상은 잉글랜드에 못 미친다. 예전에는 석탄과 철을 집적하는 항구로 유명했지만 이제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잉글랜드 평균 소득의 75% 수준에 불과하다. 워낙 일찍 합병된 탓에 스코틀랜드처럼 독립 투표를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던 중 유로 2016이 찾아왔다. 잉글랜드와 함께 C조에 배정된 웨일스는 이날 경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잉글랜드에게 한 방 먹일 절호의 기회였다.

이미 분위기는 절정이었다. 경기 전 양 팀은 설전을 통해 포화를 한번씩 주고받았다. 웨일스의 에이스 가레스 베일은 잉글랜드전을 앞두고 13일 영국 공영방송 BBC 등 현지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웨일스가 잉글랜드보다 더 높은 열정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며 "우리는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잉글랜드와의 대결은 더비와 같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결코 적에게 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잉글랜드를 두고 '적(Enemy)'이라고 표현했다. 이에 로이 호지슨 잉글랜드 감독은 "잉글랜드 역시 자존심과 자부심이 높은 팀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받아 쳤다.


사진캡쳐=웨일스 온라인

5000여 붉은 용들

카디프 중앙역에서 카디프성까지 펼쳐져있는 세인트메리스트리트에는 '어 드라이그 고흐(Y Ddraig Goch, 웨일스의 국기)'가 쫙 펼쳐져 있었다. 웨일스의 국기를 두르고, 붉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식 팬존이 있는 뷰트 파크까지 걸어가며 함성을 지르고 노래를 불렀다.

상점에는 웨일스의 유니폼과 국기가 걸여있었다. 이미 슬로바키아에게 2대1로 승리한터였다. 팬들의 사기는 하늘에 닿을 듯 했다.

뷰트 파크로 가는 길에 한 팬과 이야기를 나눴다. 조나단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휴가를 내고 응원에 나섰다. 몇몇 친구들은 이미 아침 일찍 차를 타고 랑스로 갔다. 차로 6시간 정도 걸린다. 잉글랜드가 강하기는 하지만 이 경기는 다르다. 우리 선수들의 투지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웨일스와 잉글랜드는 유로에서 첫 맞대결이다. 월드컵에서도 맞붙은 적이 없다. 웨일스는 유로에 첫 출전했다. 역대 전적에서는 14승22무68패로 절대 열세다. 하지만 단판 승부인만큼 이변을 기대해볼만했다.

뷰트파크에는 5000여 팬들이 몰려 있었다. 웨일스가 낳은 세계적 밴드 '매닛 스트리트 프리처스'가 5월 발표한 응원곡 '투게더 스트롱거(together stronger-c'mon wales)'가 계속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 노래에는 아런 램지와 가레스 베일, 에슐리 윌리엄스 등 모든 선수들의 이름이 들어가있다. 5000여 팬들은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전의를 다졌다.

장대비도 막지 못한 열정

경기 시작 10분전 하늘에서 장대비가 내렸다. 몇몇은 우산을 펼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비를 맞으면서 경기를 지켜봤다. 옷이 젖어도, 땅이 진흙으로 바뀌어도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스크린만 바라보며 선수들에 플레이에 집중했다. 판정 하나하나에 소리를 쳤다. 야유와 응원이 교차했다. 웨일스는 수비에 집중했다. 잉글랜드의 슈팅이 나올 때마다 팬들도 거기에 반응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슈팅을 막아내면 박수가 이어졌다.

전반 42분이었다. 웨일스가 프리킥 찬스를 잡았다. 가레스 베일이 볼 앞에 섰다. 뷰트 파크가 조용해졌다.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들 집중했다. 그리고 골. 뷰트 파크는 난리가 났다. 다들 뛰었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하이파이브와 노래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입고 있던 우의를 찢어 하늘로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축제 분위기였다. 전반전 종료 휘슬이 울렸다. 다들 맥주를 손에 들고 '가레스 베일!!'을 외쳤다.


웨일스 팬들
그래도 웨에일~스!

후반이 시작됐다. 팬들은 여전히 흥분 상태였다. 45분만 지나면 적들의 심장에 칼을 꽂을 수 있었다. 하지만 후반 시작 11분만에 카디프에 모인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잉글랜드에서 교체로 들어간 제이미 바디가 동점골을 넣었다. 팬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벌린 채 화면한 응시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로 응원을 펼쳤다. 승리는 아니지만 무승부도 의미가 컸다. 1승1무만 돼도 16강행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잉글랜드가 2무에 그치는 것이 중요했다. 조별리그 탈락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화면에 한 웨일스팬이 잡혔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들 뭉클한 표정을 지었다. 이 팬은 자신이 TV에 나온 것을 보자 눈물을 닦고 파이팅을 외쳤다. 뷰트 파크의 5000여 팬들도 같은 마음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하지만 5000여 팬들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후반 추가시간 잉글랜드의 다니엘 스터리지가 역전골을 넣었다. 모든 팬들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망연자실한 일부팬들은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팬들도 있었다.

뷰트 파크를 빠져나가는 길. 장대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하던 팬들 사이에서 "웨에일~스! 웨에일~스"가 울려퍼졌다. 하나둘씩 따라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곳에 모인 5000여 팬들이 함께 외쳤다. 그리고는 박수를 쳤다. 수고했다는 의미이자 마지막 3차전을 위한 격려였다.

웨일스는 21일 새벽 4시 러시아와 조별리그 최종전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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