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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후보 이름 직접 쓰던 투표, 왜 사라졌나

기사입력 2025-05-21 08:10

[서울기록원 공개 자료. DB 저장 및 재판매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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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에서 캡처. DB 저장 및 재판매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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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서울시장 선거서 유일 도입…한글 또는 한문 기입

자서식 투표에 문맹자 소외·무효표 증가…결국 중단

탄피가 기표 도장 쓰이기도…현재 '만년도장식' 표준화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유권자들은 기표소에 들어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이름 옆에 동그라미가 그려진 도장을 찍고 나온다. 이런 기표 방식을 기호식 투표라고 한다.

내달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온라인 커뮤니티와 대선 관련 뉴스 댓글에는 "투표용지에 후보 이름을 직접 쓰는 투표 방식이 왜 우리나라에는 없느냐" 등 기표 방식에 대한 궁금증이 제기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한 방식이지만, 건국 이래 줄곧 기호식 투표가 채택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과 같이 유권자가 직접 후보의 이름을 써넣는 '자서식 투표'가 도입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아주 오래전에 한 지역에서만 한번 시행된 뒤 자취를 감췄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 1960년 서울시장 선거에 자서식 투표 첫 도입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자서식 투표가 처음 실시됐던 때는 1960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였다.

1960년은 정치적으로 격동의 한해이면서 '선거의 해'였다. 그해 3월 15일 대선에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부정행위로 4·19 혁명이 발발했다.

이 영향으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하야했고 헌법도 개정됐다.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내각책임제가 도입됐고, 국회는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로 바뀌었다.

그해 7월 29일엔 민의원·참의원 총선거가 실시됐고, 8월 12일 국회에서 윤보선 대통령이 간접선거로 선출됐다.

이후 11월 1일엔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도지사, 서울시장, 시·읍·면장이 직선제로 선출되게 됐다.

이에 따라 12월 12일 시도의회 의원 선거, 19일 시·읍·면의회 의원 선거, 26일 시·읍·면장 선거, 29일엔 시·도지사 선거가 연이어 치러졌다.

이중 서울시장 선거에서만 유일하게 자서식 투표가 도입됐다. 투표용지에 후보자 1인의 성명을 한글 또는 한문으로 직접 써넣는 방식이었다.

이는 서울시민의 '높은 지식수준'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1960년 5월 18일자 경향신문은 "서울특별시는 일반 지식수준이 높기 때문에 서구식으로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기입 투표해도 손색이 없다"고 당시 자서식 투표를 주장한 의원들의 발언을 전했다.

반대 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의 보도에 따르면 반대자들은 문맹 유권자 약 7만명의 참정권이 박탈될 수 있고 무효표가 증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찬성론자들은 "13년간의 선거를 붓대통으로 투표해왔다는 것은 문명국가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문맹자도 선거기간 후보자 이름 석 자 정도는 충분히 익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 서울시장 선거 '자서식 투표'에 투표율 저조·무효표 비율 높아

사실 문맹자 문제는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1960년 11월 1일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시교육위원회가 조사한 결과 서울 시내 문맹자 16만명 중 20세 이상의 유권자가 11만명이나 됐다.

이는 서울시 유권자 111만명의 10%가량 되는 규모였다. 당시 경향신문이 해당 보도의 제목을 "벌써 10% 기권한 셈"이라고 뽑았던 이유였다.

시교육위 측은 이들에게 무상으로 한글 교육을 하려면 경비가 1억1천600만환이 들 것으로 추산했다.

당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만2천900환인 점을 감안하면 1천127명분의 GDP에 해당하는 액수로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인당 GDP를 반영해 환산하면 약 563억원에 달한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시교육위 측은 서울시에서 후보자 등록이 끝난 후 동별로 문맹 유권자를 집합시켜 본인과 후보자 이름만 가르치면 된다고 하면서 이는 선거 대책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문맹 퇴치이므로 서울시 소관 업무라고 넘겼다. 이에 서울시 당국자는 문맹 퇴치는 어디까지나 주무관청인 교육위가 해야 할 일이라며 반박했다.

경향신문은 이를 두고 "선거일이 2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과연 어떤 묘안이 그들(문맹 유권자들)의 주권 행사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다"고 꼬집었다.

서울기록원이 공개한 1960년 선거 기록에 따르면 결국 시교육위가 '문맹 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 성인반'을 꾸렸지만 한글 강습이 정말 효과적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중앙선관위가 발간한 '대한민국선거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시장 선거의 투표율은 36.4%로, 전체 평균 투표율인 38.8%를 밑돌았다.

서울의 투표율은 경기(32.8%), 경남(33.2%), 경북(35.8%)에 이어 10개 시도 가운데 4번째로 낮았다.

'대한민국선거사'는 이 투표율이 유권자들이 "거의 무관심 상태"를 드러낸 것이라며 "선거 사상 유례없는 지극히 불량한 투표율"이라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선거사'는 이런 저조한 투표율은 12월에 지방선거가 4차례 연이어 치러진 탓에 마지막에 있었던 광역 자치단체장 선거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졌고 당시 날씨가 상당히 춥고 눈도 내렸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하지만 당시 자서식 투표의 도입이 저조한 투표율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대한민국선거사'는 문맹자의 투표 참여가 적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투표율만이 아니었다. 무효표도 속출했다.

1960년 12월 30일자 조선일보는 '욕설과 하소연'이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기명식 투표는 욕과 하소연, 심지어 이승만 또는 '김○○ 만세'라는 등 해괴망측한 무효표가 속출했다"라고 전했다.

'김○○ 만세'라는 표가 나와 개표종사원들을 긴장케 했다고 묘사한 것을 보면 ''김○○'은 북측 김일성 당시 위원장을 가리킨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이야 죽든 말든 너희들은 싸움만 하느냐", "독재와 싸운 사람 내세워보았으나 별수 없다"는 등의 무효표도 있었다.

'대한민국선거사'에 따르면 서울시장 선거의 무효표 비율은 9.7%로, 전국 평균인 4.8%의 배나 됐다.

이후엔 어떻게 됐을까. 자서식 투표는 당초 서울시에 한정해 도입했다가 다른 광역 지자체로 확대 시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첫 시행부터 적지 않은 문제가 드러났고, 이듬해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지방자치제도 자체가 급변하면서 이 실험을 이어갈 상황이 되지 못했다.

1961년 9월 제정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자치단체장이 임명제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이후 자치단체장의 직선제 선거가 부활할 때는 이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95년 6월이었다.

◇ 2005년 인주가 내장된 '만년도장식' 기표 용구 도입

1960년 서울시장 선거라는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면 줄곧 기호식 투표가 시행됐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기호식 투표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기표에 쓰이는 도장인 기표용구의 재질에서 기표 모형까지, 관련 규정이 생기고 점차 표준화됐다.

중앙선관위와 선관위가 발간한 '대한민국을 만든 70가지 선거이야기'에 따르면 1948년 민주 선거가 도입된 이후 초기 선거법엔 기표용구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실제 1948년 5·10 총선거에서는 기표소에 마련된 필기 용구로 지지하는 후보자 칸에 O, X, V 등을 표기하는 방식으로 투표가 진행됐다.

이후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부터 기표 모형이 'O'로 정해졌다. 단, 기표용구에 대한 규정이 없어 대나무나 붓대, 심지어 탄피가 기표용구로 쓰였다. 당시 6·25 전쟁이 진행 중이어서 일부 지역에선 탄피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 인제 보궐선거에선 '호박 꼭지'를 기표용구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자서식 투표의 도입을 주장한 국회의원이 "13년간의 선거를 붓대통으로 투표해왔다"고 말했을 때 붓대통이 이 당시 기표용구로 사용된 붓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1970년대 들어서 플라스틱 기표용구가 제작·활용됐다. 일부 지역에선 그 유명한 '모나미 볼펜'이 쓰이기도 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기표용구가 전국적으로 통일됐다.

중앙선관위가 1983년 '선거관리용품 개선 연구반'을 가동해 선거관리용품 14개를 표준화했고, 그 결과 12대 총선부터 전국 투표소에 표준화된 기표용 인주와 플라스틱 기표봉이 배치됐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선 기표 모형인 동그라미 안에 사람 '인(人)'자 들어갔다. 투표용지를 접는 과정에서 잉크가 번지면서 무효표로 처리되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인(人)'자가 '시옷(ㅅ)' 자와 유사해 동그라미 안의 '인(人)'자가 당시 유력 후보였던 김영삼 후보의 이름을 연상케 한다는 항의가 제기됐다.

이에 따라 1994년 통합선거법이 제정되면서 기표 모형은 현재와 같이 동그라미 안에 점 '복(卜)'가 들어간 형태로 변경됐다.

2005년부터는 인주가 내장된 일체형 기표용구가 등장했다. 이른바 '만년도장식' 기표용구로, 5천번 이상 균일하게 기표할 수 있고, 뚜껑이 열린 채로도 60일 이상 잉크가 마르지 않았다.

이후로도 기표용구는 꾸준히 개선돼 기표 즉시 건조되는 특수한 '속건성 유성잉크'가 도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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