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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하버드를 상대로 한 '승리'

기사입력 2025-06-01 11:10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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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에게 미국의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은 마치 명품 브랜드처럼 갈구의 대상이 된다.

그중에서 하버드대는 아마도 최고급 브랜드인 '에르메스' 정도의 지위를 가지지 않을까.

기자도 가족들과 보스턴을 방문했을 때 외국 명품 브랜드 구경하듯 하버드대 교정을 둘러봤다.

처음엔 '극성 아시아계 학부모'로 비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한 주말 하버드 교정의 모습은 그런 걱정을 기우로 만들 정도로 관광객으로 보이는 방문자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캠퍼스 중앙광장인 하버드 야드에서 도서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고, 그 중엔 한국인 가족도 적지 않았다.

캠퍼스 곳곳에 있는 기념품 매장에는 상징색인 '크림슨 레드' 빛깔의 하버드 티셔츠와 대학 로고가 찍힌 기념품을 사려는 방문객들로 가득 찼다.

이런 지위와 위상에도 불구하고 하버드를 비롯한 미국 명문대학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집중 표적이 될 것이란 사실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미국 내 강경 우파 세력들은 그동안 명문 대학들이 '워크'(woke·진보적 가치를 강요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적 용어) 담론을 생산하는 진보 이데올로기의 보루 역할을 해왔다고 지목해왔다.

하버드는 그중 가장 상징적인 표적이 될 운명이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처음엔 하버드를 상대로 '학내 반유대주의 방치'를 빌미로 삼아 조사를 시작했다가 이후 학내 DEI(다양성·포용성·형평성) 정책, 편향된 학사 커리큘럼으로 문제 제기 대상을 확대한 것도 따지고 보면 예고된 행보였다.

트럼프 행정부는 DEI 정책 폐기를 요구하고 나아가 입학·채용 과정에 정부 입김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학내 정책 변경을 요구했다.

하버드는 학문의 자유 침해라며 이를 거부했고, 트럼프 행정부는 '괘씸죄'를 물어 집중포화를 개시했다.

각종 연구 프로젝트에 쓰이는 3조원대 규모의 연방 지원금이 중단했고, 하버드대에 대한 면세 지위 박탈을 검토하고 나섰다.

지난 23일엔 하버드대의 외국인 학생 등록을 차단하는 조치까지 내렸다. 이 조치는 다음 날 곧바로 법원의 명령으로 중단되긴 했지만, 여전히 법적 불확실성이 남아있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받은 충격과 불안은 매우 컸다. 하버드대의 외국인 유학생 및 연구자는 한국인 434명을 포함해 약 6천800명으로 전체 학생의 약 27%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비중을 15%로 낮추라고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하버드대 공격에 대해선 보수적 시각을 대변하는 매체도 일찌감치 우려를 제기해왔다.

영국의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행정부의 DEI 정책 변경 요구가 충분히 합리적으로 들릴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과학에 대한 공격은 초점이 없고 가식적이다"라고 비판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다른 기사에서 "미국이 학문 인재 유출을 겪을 위험에 처했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버드 사태와 관련해 최근 기자의 관심을 끈 것은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에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강경 보수 성향 매체인 뉴욕포스트는 최근 사설에서 "트럼프 행정부 팀은 하버드를 상대로 한 '승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뉴욕포스트는 "보조금 취소, 면세 지위 취소 시도, 외국인 학생들에 대한 비자 취소 등등이 지속되면서 대부분의 관찰자 눈에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며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순전히 보복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핵심 지지 진영에서조차 '도대체 왜 저러냐'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하버드와 같은 엘리트 대학들은 미국 기득권층의 정신적·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이들에게 사회적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하는 원천이 돼왔다.

또한 엘리트층의 기득권 지위를 재생산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트럼프 핵심 지지층은 미국 엘리트 대학이 반유대주의와 '좌 편향'의 집단사고에 빠져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고칠 것을 요구해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외과적인 수술'이지 엘리트 기득권 구조의 근간에 손상을 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강경 보수 매체조차 트럼프의 과격한 행보를 우려하는 것은 근저에 이런 조바심이 반영된 게 아닐까. 내가 고치라고 했지 망가뜨리라고 했냐.

pan@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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