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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전 첫 총성이 울린 6·25전쟁은 정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지만,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국가와 가족을 위해 목숨 바친 국군 유해 12만1천723구가 땅속에 묻혀 있다. 살았어도 죽느니 못한 고통을 겪다가 현재 대부분 숨졌을 국군 포로 수만 명이 여전히 북한에 있다.
◇ 미수습 유해 12만1천723구…끝까지 찾는다
6·25전쟁 중 전사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16만2천394명이고 그 가운데 2만9천202명은 전쟁 직후 현충원에 안장됐다.
현재 수습되지 않은 국군 유해는 12만1천723구에 달한다. 해방 후 미흡했던 행정체계와 북한의 기습으로 일어난 전쟁이었던 탓에 전사·실종자를 원활하게 수습·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전 후에는 미래를 위한 경제 개발에 온 나라가 집중하느라 과거의 전사자를 돌아볼 여건이 제한적이었다.
정부는 6·25전쟁 발발 50년이 되던 2000년부터 유해 발굴 사업에 나섰고 2007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면서 유해 발굴을 지속해 나가기 위한 토대가 마련됐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지난해까지 총 1만3천383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 가운데 국군 유해는 1만1천469구이고 유엔군 유해 37구 외에 북한군, 중공군의 유해도 포함돼 있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년에 1천 구 넘는 국군 유해가 발굴되는 해들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지난해 166구, 2023년 150구, 2022년 141구 등으로 줄어든 편이다.
정전 이후 한국 경제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면서 몰라보게 달라진 국토 상황은 유해 발굴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전쟁 중 격전지였던 땅에 시가지가 들어선 곳이 적지 않다.
더욱이 북한에 3만여 구, 비무장지대(DMZ) 일대에 1만여 구의 국군 유해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의 발굴은 더욱더 난망하다.
전사자 관련 기초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굴 유해의 신원 확인은 유가족과의 DNA 대조를 거쳐야 한다.
DNA 시료 채취에는 6·25 전사자 유가족으로서 전사자의 친·외가 포함 8촌까지 참여할 수 있다. 제공한 유전자 정보로 전사자 신원이 확인되면 포상금 1천만 원이 지급된다.
그러나 전쟁 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직계 유가족이 급감해 유전자를 채취할 수 있는 대상자가 많이 남지 않아 유해발굴감식단은 이를 두고 '시간과의 싸움'이라 표현한다.
유해 발굴 사업이 시작된 2000년 이래 신원이 확인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국군 전사자는 256명이다. 정전 후 70년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이라는 '또 다른 전쟁'은 이제 초입에 들어선 것과 같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올해도 땅이 어는 11월 말까지 지역별 발굴 계획을 세워두고는 전국 곳곳에서 땅을 파고, 유해에 묻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고, 케케묵은 서류를 뒤적이면서, 친인척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미수습 국군 전사자 12만1천723명을 기억하고 끝까지 찾아내겠다는 각오로 1∼121723번의 고유 번호를 새긴 태극기 배지 12만1천723개를 최근 제작해 국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 태극기는 6·25전쟁 당시 국군에 너무나도 귀했고 오늘날 세계 시장을 누비는 국산 베스트셀러 무기, K9 자주포 제작 과정에서 나온 철을 활용해 만들었다.
◇ 국군포로 1만9천명 이상…"송환은 국가의 본분과 도리"
국군포로는 6·25전쟁에서 북한에 붙잡힌 국군 용사들이다. 전쟁 발발 75년이 지났음에도 포로 문제는 정전 후 상황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군포로 문제를 주관하는 국방부에 따르면 6·25전쟁 군인 행방불명자 중 생사 확인이 불가능해 북한에 포로로 억류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원은 1만9천409명이다.
정전 당시 유엔군사령부가 집계한 국군포로 및 실종자 수는 8만2천318명인데 이는 군적에 없으나 전투에 참여한 학도의용군 또는 특수부대 요원 등까지 포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정전 후 한국과 유엔군은 북한군 포로 3만여 명을 돌려보냈으나 북한은 국군포로 8천343명만 송환했다. 그러고는 "강제 억류 중인 국군포로는 공화국에 한 명도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북한에 의해 존재를 부정당한 국군포로들은 북한에서 최하층의 출신 성분을 부여받고 탄광 등 열악한 공간에 배치됐다고 탈북민들이 증언한다. 월남 가족, 지주 가족 등이 이들과 같은 수준의 출신 성분이었다.
대부분 1930년대 초반 태어난 국군포로들은 살아 있다면 현재 90세가 넘었을 상황이다. 수백 명 수준의 생존 국군포로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 숫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국군포로는 대부분 탈북 등의 경로로 총 80명이 귀환했으며, 2011년이 마지막 귀환 시점이었다. 현재 국내에 생존한 국군포로는 7명이다.
정부는 정전협정 이후 계기가 있을 때마다 지속해서 포로 송환 문제를 협의했지만, 북한이 비협조로 일관했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에서 실태 조사마저 쉽지 않았다.
해결이 요원하지만, 국방부는 "국가의 본분과 도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일관된 원칙에 따라 송환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비록 실질적 조치를 도출하지는 못하더라도 범정부 국군포로대책위원회라는 회의체를 1999년부터 꾸준히 가동하고 있기도 하다.
국군포로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 '물망초'의 이사 이재원 변호사는 한 세미나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붙잡힌 포로를 다시 데려오는 문제는 단순한 인권적 차원을 넘어 국가가 국민에게 애국심을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적 기초"라고 사안의 성격을 정의했다.
새 정부 들어 국군포로 문제에 진전이 있을지 관심사다. 이재명 대통령은 당 대표 시절이던 2023년 11월 국군포로 김성태 옹의 장례식장에 '謹弔(근조)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이재명'이라고 적힌 조기를 보냈다.
민주당 계열의 정당 대표가 국군포로에게 조의를 표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북한 주민 인권 개선을 약속하면서 "이산가족, 납북자, 국군포로, 북한이탈주민 등 분단의 고통을 겪는 우리 국민을 위한 인도적 지원과 제도 개선에도 힘을 쏟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jk@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