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다 못한 정부도 칼을 빼 들었다. 관계 장관 회의를 열어 석유화학 업계가 부진한 사업 부문을 자발적으로 구조조정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정부도 업체별 자구 계획을 보고 그 수준에 맞춰 각종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른바 채찍과 당근이다. 말로만 압박한 게 아니라 10대 석유화학 기업이 최대 370만t 규모의 나프타분해시설(NCC) 감축을 목표로 연말까지 구체적인 사업재편 계획을 제출하도록 협약까지 체결한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을 정부 스스로 인정할 만큼 업계 상황이 심각하지만, 지금이라도 적극적인 대처 의지를 천명한 건 안팎에 긍정적 신호가 될 수 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발신한 경고음은 비장할 정도다. 그는 업계와 관계 당국을 향해 "'버티면 된다', '소나기만 피하면 된다'는 안이한 인식으로는 위기를 절대 극복할 수 없다"면서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반드시 죽을 각오로 임해야만 살 수 있다는 병법의 고전을 인용한 것이다. 흔한 표현인 '뼈를 깎는 각오'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이는 우리 석유화학 산업의 고질병이 된 과잉 공급·시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자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의 표현이다.
한국 석유화학의 위기는 단편적·일시적인 게 아니라 오랜 구조적 요인에 따른 것이어서 더 심각하다. 중국발 공급 과잉 및 대중국 수출 감소, 중동 국가들의 정유 능력 확대, 세계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감소, 환경 규제 강화 등 복합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특히 NCC 중심의 높은 나프타 의존도는 원자재인 원유 가격 변동성에 매우 취약한 구조를 만들었다. 북미와 중동 업체들은 비교적 저가인 셰일가스 등을 기반으로 가격 경쟁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정부가 NCC 감축을 핵심 과제로 요구한 것도 이런 배경 탓이다. 무엇보다 이런 구조적 악재가 이미 예고된 것들인데도, 국내 업계가 호황에 취해 오히려 생산시설을 늘리고 고부가가치 품목 전환도 빨리 이루지 못해 위기를 자초했다.
우선 업계는 효율적이고 혁신적인 사업구조 재편안을 신속하게 제시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불필요한 중복 시설 통합, 이차전지 소재와 친환경 소재 등 고부가가치 제품 증산, 에탄과 액화석유가스(LPG)를 비롯한 저가 원료 활용 확대 등을 통해 과거 경쟁력을 회복해야만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원책이 아직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는 정부도 비장한 각오에 걸맞은 예리한 종합대책을 만들어야 한다. 과감히 썩은 살을 도려내려는 기업에는 파격적인 금융 지원과 무리한 규제의 완화로 화답해야 한다. 산업 안전 위험이 상존하는 중화학 공업의 특성에 맞는 규제 개선도 계속 이뤄져야 하고,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 대책도 업계 및 노동계와 합리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고통을 참으며 구조조정에 성공한 조선업의 화려한 부활 선례를 재현하겠다는 정부의 바람이 이뤄지길 바란다.
leslie@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