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지방선거가 20여일 앞으로 바짝 다가오면서 전국 선거구가 이색 경력을 가진 후보들의 등장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과거 지방선거가 퇴직 공무원이나 지역 토착 정치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면 이번 선거는 배달 노동자, 예술인, 전직 프로선수, 개그우먼 등 우리 사회 곳곳의 '살아있는 현장'을 대변하는 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양상이다.
◇ "내가 곧 정책의 현장"…전세 사기 대책위·플랫폼 노동자 도전
이번 선거의 뚜렷한 특징은 거창한 담론보다 생활 속 부조리를 직접 해결하겠다는 현장 전문가들의 약진이다.
인천 미추홀구에서는 전세 사기 사건 피해자들을 대변해온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이 민주당 기초의원 후보로 나섰다.
안 위원장은 "전세사기 피해자뿐만 아니라 세입자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낼 사람이 필요해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충북 청주시 기초의원 '차' 선거구에 출마한 정의당 길한샘(33) 후보는 현직 배달라이더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라이더유니온지부 충북지회장인 그는 "200만원을 벌어도 오늘을 지키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들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배달용 오토바이를 타고 골목을 누비며 플랫폼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최우선으로 내세우고 있다.
제주와 충북에서도 '주민 행복 배달부'를 자처하는 택배 배송 기사들의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제주도의원 선거에 나선 진보당 송경남(60) 후보와 청주시의원 선거에 출마한 진보당 이복규(56) 후보는 수년간 시민의 문 앞까지 물건을 배달하며 체감한 골목길의 민심을 의회에 직접 전달하겠다고 강조한다.
제주도의원 오라동 선거구에 나선 진보당 부람준(42) 후보는 택시 기사로, 택시 노동자 처우 개선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요양보호사 출신인 제주도의원 강순아(41) 후보는 "어르신이 편안하고 아이들이 안전한 지역사회 통합 돌봄 모델을 완성하겠다"며 복지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부각하고 있다.
광주에서도 간호사 출신인 김혜란(49) 후보와 돌봄 노동자 최경미(59) 후보가 현장의 경험을 입법 활동으로 연결하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 '웃찾사' 개그우먼부터 '골키퍼'까지…문화·체육계 인사의 '인생 2막'
대중에게 친숙한 인지도와 성실함을 무기로 정계에 입문하려는 인사들도 화제다.
경기 성남시의원 비례대표로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박민영(39) 후보는 SBS 공채 개그우먼 출신이다.
과거 인기 프로그램 '웃찾사'에서 활약했던 그는 10여년간 꾸준히 이어온 봉사활동 현장에서 제도적 한계를 느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며 이번 도전을 준비해왔다.
체육계 인사들의 도전도 활발하다.
경북도의원 선거에 나선 민주당 임민혁(32) 후보는 2023년까지 전남 드래곤즈 등에서 활약한 프로축구 골키퍼 출신이다.
그는 은퇴 당시 "땀 흘려 노력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계를 꿈꾼다"는 글로 화제를 모았는데, 이를 정치 현장에서 실현하겠다는 포부다.
경남 김해에서는 현역 경륜 선수인 개혁신당 문현진(39) 후보가 시의원에 도전한다.
투병 중인 어머니에게 간을 이식해 준 효자로도 잘 알려진 그는 선거운동 현장에서도 주황색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누비며 "4년의 임기를 올림픽 준비하듯 열정적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부산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세 딸을 키우는 워킹맘인 국민의힘 윤보영(40) 후보가 문화 예술적 감수성을 담은 정책을 내세우며 엄마들의 표심을 공략하고 있다.
◇ "최연소·최고령·최다 출마"
연령과 기록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후보들이 대거 등판했다.
제주와 부산에서는 만 19세 청년들이 도전장을 내밀어 'Z세대 정치'의 시작을 알렸다. 정근효(19) 제주도의원 후보는 청년 정책 1호로 매달 15만원의 청년 수당과 교통비 지원을 내걸었고, 권민찬(19) 부산 금정구의원 후보는 과학고 출신의 이공계 인재로서 데이터에 기반한 행정 혁신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관록의 후보들도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경남 의령에서는 무소속 김규찬(74) 후보가 7선 고지를 노린다.
1992년부터 선거에 나서 25년째 의령군의원으로 활동 중인 그는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일꾼"임을 자임한다.
대구에서는 서중현(74) 전 서구청장이 교육감 선거에 예비후보로 등록하며 인생 19번째 선거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다.
전남 목포에서는 국회의원을 지낸 손혜원(71) 전 의원이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이른바 '체급 낮추기' 도전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거물급 인사의 기초의원 도전이 지역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유권자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 이름으로 각인…'김대중·윤석열·박정희·박근혜' 동명이인 후보들
전직 대통령들과 이름이 같은 후보들은 인지도 면에서 상당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포항의 윤석열(61) 시의원 후보는 이름 때문에 생기는 오해와 관심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줄 서는 정치가 아닌 주민 곁에 서는 정치를 하겠다"고 강조한다.
대구시의회 비례대표로 출마하는 박정희(56) 후보는 무용을 전공한 예술가로, 위안부 할머니와 사회운동가들을 위한 추모 무대를 이어온 경력을 가지고 있다.
군산에서도 전북도의원에 도전하는 박정희(66) 후보가 있어 호남과 영남에서 동시에 '박정희'라는 이름이 투표지에 오르게 됐다.
김천의 박근혜(53) 시의원 후보는 선친이 지어준 이름에 담긴 뜻을 이어받아 지역 혁신도시 활성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전북 정읍시장에 나섰던 김대중 예비후보는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으나 익산의 김대중 예비후보는 전북도의원 3선에 도전한다.
충남 태안에서는 고 윤형상 전 군수의 아들인 윤희신(58) 국민의힘 후보가 2대째 민선 군수에 도전하며 눈길을 끌고 있다.
◇ 화려한 이력 뒤 가려진 '전과 기록'…유권자 현미경 검증 비상
하지만 이색적인 배경과 화려한 경력 뒤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는 유권자들이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후보자 명부에 따르면 상당수 후보가 다수의 전과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남 의령의 김규찬 후보는 폭력, 특수절도, 공무집행방해 등 총 8건의 전과가 있으며, 제주와 경남·전남 지역의 일부 기초단체장 및 의원 후보들 역시 무면허·음주운전, 상해, 도박장 개장 등 적게는 5건에서 많게는 15건에 달하는 전과를 보유하고 있다.
인천시 강화군 기초의원에 무소속으로 도전장을 내민 김병연 예비후보는 건축법 위반, 사기, 상해, 공무집행방해, 음주운전 등 15건의 전과 기록을 선관위에 제출했다.
특히 광역의원 선거에 나선 일부 후보들은 과거 시의원 시절 음주운전 적발 사실을 숨겼거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이미 한 차례 군수직을 상실한 이력이 있음에도 다시 출마해 도덕성 검증의 도마 위에 올랐다.
(양지웅 천정인 우영식 전지혜 전창해 차근호 이준영 김준범 박철홍 이우성 손대성 김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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