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이탈리아)=스포츠조선 이현석 기자]느리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스노보더 김상겸(37·하이원리조트)이 기어코 해냈다. 3전4기 끝에 올림픽에서 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상겸은 8일(한국시각) 이탈리아 리비뇨 스노파크에서 열린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알파인 평행대회전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2018년 평창에서 '배추보이' 이상호가 설상 첫 메달을 딴 이후, 8년 만에 설상 종목 메달을 추가했다. 김상겸에게는 생애 첫 올림픽 메달, 이번 대회 대한민국 선수단의 첫 메달이다. 한국 올림픽 역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김상겸이 따낸 메달은 한국의 400번째 올림픽 메달이다. 김상겸은 "드디어 얻었다. 정말 기쁘다. 시상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팀 덕분이다"고 감격했다.
반전의 연속이었다. 김상겸은 한 편의 드라마를 써내려가며 눈밭 위의 질주를 이어갔다. 1차예선에서 다소 아쉬운 43초74를 기록했다. 레드코스를 탄 2차예선에서 43초44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며 분위기를 바꿨다. 1분27초18로 8위에 올라 예선 통과를 확정했다. 16강 상대는 2022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배추보이' 이상호를 꺾었던 잔 코시르(슬로베니아)였다. 코시르는 경기 도중 넘어지며 김상겸이 웃었다. 8강 상대인 '세계 1위' 롤란드 피슈날러(이탈리아)도 실수가 나오며 역전에 성공했다. 불가리아의 테르벨 잠피로프까지 제압한 김상겸은 '빅 파이널(결승전)'에서 벤야민 카를에 0.19초 차이로 패했다. 아쉬움은 남지만, 분명 값진 은메달이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경기 전까지 김상겸의 이름 석자는 가물가물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한때는 2011년 에르주르 동계 유니버시아드 평행대회전에서 정상에 오르며 한국인 최초로 세계 대회에서 스노보드 금메달을 수확한 유망주였다. 한체대 졸업 후 실업팀에 들어가지 못해 막노동까지 했다. 그런 와중에도 스노보드를 놓지 않았다. 선수 생활을 이어 나갔지만, 유독 올림픽과 인연이 없었다. 2014년 소치에서는 예선 탈락, 2018년 평창에서는 8강 진출에 실패했다. 2022년 베이징에서도 24위로 예선에서 짐을 싸야 했다.
하지만 포기는 없었다. 김상겸은 마치 '토끼와 거북이' 속 거북이처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0.01초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평행대회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느리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고된 과정, 12년의 도전 끝에 올림픽 메달이라는 낭보를 전했다. 스스로는 노력의 결과를 믿고 있었다. 김상겸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목표는 1위다. 지난 4년간 후회없이 준비해 왔으며 그 과정의 결과를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개인 SNS를 통해서도 '수없이 시도했고,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올림픽은 매번 달랐지만, 각오는 늘 같다. 대한민국을 대표해 다시 한번 이 자리에 설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의 네 번째 올림픽, 많은 응원 부탁드린다'고 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미 준비된 메달리스트였다.
사진=김상겸 아내 SNS 캡처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을 버티게 한 원동력도 있다. 가족이었다. 아내가 언제나 그의 곁에서 묵묵히 도전을 응원했다. 김상겸의 아내는 은메달 확정 후 개인 SNS를 통해 '남편 목에 걸린 은메달이 얼마나 무겁고 소중한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며 '부족한 우리 남편을 늘 예뻐해 주시고, 힘들 때마다 따뜻한 격려로 일으켜 세워준 그 마음들 항상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김상겸도 시상식 이후 곧바로 아내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 메달의 기쁨을 가장 먼저 나눴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아내가 가장 많이 생각난다. 가족들이 힘을 실어준 덕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부모님과 아내에게 메달을 걸어주고 싶다"고 울먹였다.
기적과도 같은 은메달, 하지만 행운만으로 달성할 수는 없는 성과였다. 묵묵히 눈 덮인 언덕을 내려온 스노보더와 이를 믿어준 가족들의 응원이 연출한 '하늘의 선물'이다. 밀라노(이탈리아)=이현석기자 digh1229@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