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안방극장에서 왕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여러 편의 사극이 방영되고 있지만 왕의 존재감은 어느 때보다 미미하다. 왕이 주인공 자리에서 밀려난지 오래일 뿐만 아니라 왕조사를 다룬 작품들은 번번이 시청률에서 쓴 맛을 보고 있다.
KBS1 '대왕의 꿈'은 안방극장에서 방영 중인, 사실상 거의 유일한 정통사극이다. '근초고왕'(백제)과 '광개토태왕'(고구려)을 잇는 삼국 시리즈의 마지막 편으로,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통일신라 건국사를 다뤘다. 사극 장르에선 독보적인 위엄을 지닌 최수종이 무열왕 역을 맡아 기대를 모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드라마는 KBS 대하사극의 정통성과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는 중이다. 작품 자체보다는 박주미 최수종 등 주연배우들의 잇따른 부상 소식이 더 자주 회자됐던 탓일까. 전작 '광개토태왕'이 극 중반 이후 20% 가까이 시청률이 치솟았던 것과 달리, '대왕의 꿈'은 60회를 넘어선 현재까지도 10%에 간신히 턱걸이를 하고 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건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도 마찬가지다. 훗날 희빈의 자리에 오르는 장옥정이 조선시대 패션디자이너였다는 설정을 가미해 캐릭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지만 의도치 않게 역사 왜곡 논란만 겪었다. 장옥정과 숙종의 멜로나 권력 주변 인물들의 궁중 암투도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연기력 논란에 휩싸인 김태희표 장옥정에 비해 숙종 캐릭터가 그나마 돋보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캐릭터의 매력보다는 유아인의 연기력과 카리스마에 기댄 측면이 크다.
반면 궁궐 밖 이야기를 그린 사극들은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MBC '구가의 서'는 15% 안팎의 시청률로 동시간대 정상을 지키고 있고, 이에 앞서 '마의'도 20%에 가까운 시청률로 월화극 왕좌를 장기집권했다. '구가의 서'는 반인반수 캐릭터를 내세운 판타지 사극. '마의'도 천민 출신 마의에서 어의가 된 실존인물 백광현이 주인공이다. 시청률은 비교적 아쉽지만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는 KBS2 '천명'은 아픈 딸을 살리기 위해 사투를 펼치는 조선판 도망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마의'에는 현종이, '천명'에는 인종이 등장하지만, 왕조사가 중심은 아니다. 지난해 신드롬을 일으킨 MBC '해를 품은 달'도 배경만 궁궐일 뿐 역사와는 상관 없는 판타지 사극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극=왕조사'라는 공식도 이젠 옛말이 됐다.
한 방송 관계자는 "과거엔 사극 하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정통사극을 많이 떠올렸지만 이제는 퓨전사극이 사극 장르를 대표할 만큼 대세로 자리잡았다"며 "왕조사는 자유로운 창작이나 허구적 설정을 가미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소재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유난히 사극을 좋아하는 국내 시청자들의 취향 탓에 앞서 수많은 왕조사가 드라마로 제작돼 더 이상 색다른 이야기를 발굴하기 어렵다는 것도 한 요인으로 꼽힌다. 조선왕조는 태조 이성계부터 시작해 500년의 역사를 거의 훑다시피했고, 고구려 '주몽'과 신라 '선덕여왕'처럼 사료가 부족한 왕조까지 사극으로 다뤄져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는 얘기다. 사극을 표방했으나 역사적 맥락에서 자유로운 퓨전사극이 일반화된 건 이런 현실적 고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또 다른 관계자는 탈권위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한 가지 원인을 찾았다. 이 관계자는 "사회 구조가 수평화되면서 제왕적 카리스마가 더 이상 호소력을 가질 수 없게 됐다"며 "사극 속 왕들의 위엄있는 모습이 예전만큼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또 "지난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한 것에는 대선을 앞두고 바람직한 지도자를 꿈꾸는 대중들의 열망이 반영돼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회적 이슈도 없어서 왕조 중심의 사극이 더더욱 눈길을 끌기 어려워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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