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출판계에서 드물게 '북펀드' 형식으로 만든 책이 출간돼 관심을 모은다. 한국CFO스쿨이 운영하는 비즈니스 커뮤니티인 N클럽 회원 6명이 펴낸 '리스판서블 컴퍼니, 파타고니아'(틔움)이다.
북펀드는 출판사가 외부의 투자를 받아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2년에는 한길사가 '로마인 이야기'의 책 판권을 담보로 국민은행으로부터 20억원을 대출받은 적이 있다. '파타고니아'는 이런 북펀드와는 성격이 다르다. 회원들이 책에 대한 투자는 물론 번역과 제작에도 참여했다는 점이 새롭다. 단순히 수익을 내기 위해 책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책 만드는 즐거움을 공유한 것이다.
이번 '파타고니아' 북펀드 아이디어는 심규태 한국CFO스쿨 대표가 냈다. '적당한 책을 정해 번역도 하고, 소액투자도 하여 제작비를 만들어서 수익을 나누자'는 취지를 설명했다. 양미경 에이온휴잇 상무, 박찬웅 에듀박스 상무, 장인형 틔움출판 대표, 조용노 내오미오 대표, 최원호 카길에그리퓨리나 이사가 선뜻 동참했다. 회원들은 1인당 300만원씩 투자하고, 번역할 책을 직접 고르고, 번역도 나눠서 맡았다.
제작 과정은 쉽지 않았다. 책의 제목을 정하고, 번역 내용을 조율하기 위해 수많은 토론을 했다. 양미경 상무는 "모두 기업 임원이거나 경영자들이어서 토요일 오전이나 밤늦게 회의를 하느라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 이 과정에서 책에 대한 애정과 회원들의 인간관계가 더 깊어졌다"고 말했다.
한국CFO스쿨은 각계의 재무 담당 책임자(CFO)들의 휴먼 네트워크다. 사업 정보를 교환하고 투자 아이템을 발굴, 교육하고 있다. 회원들은 대부분 재무 분야 전문가들이다. 그래서 관련 전문서를 눈여겨보다가 '파타고니아'를 선택했다. 단지 경영, 재무 전문서가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회원들의 마음을 끌었다. 지구 환경과 경영이 접목된 보편적인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파타고니아'는 미국의 유명 아웃도어 의류 회사인 파타고니아의 경영 정신을 담은 책이다. 이 회사 경영 철학의 핵심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책임'이다. '뉴욕타임스'에 자사 제품을 사지 말라고 광고하고, 신제품을 사기 전에 중고품을 수선해서 입으라고 권하고, 아빠 옷을 아들에게 물려주기를 권하는 특이한 회사다. "쓸모 없는 제품을 만들지 말자"는 것도 이 회사의 모토다. 특히 적자가 나도 매출액의 1%를 기부한다. 그러면서도 2008년 미국 금융 위기 때 50%의 성장을 이뤘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포춘'지는 지구상에서 가장 '쿨'한 기업으로 선정하고, 예일대 경영대학원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아무리 책 만드는 즐거움이 크다지만, 일단 투자했으니 수익을 내야 한다. 북펀드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출판사와 생산형 독자가 윈-윈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단, 전제 조건이 있다. 투자 수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 투자 프로젝트는 아니다. 그래서 심규태 대표는 "앞으로 북펀드를 활성화시켜서 투자와 수익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밝히면서도 "반드시 수익을 내야 하는 사람들은 투자자로 참여시키지 않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책의 발굴, 생산, 유통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이번 투자자 겸 번역자들은 책의 홍보, 프로모션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북펀드는 책을 사서 읽기만 하는 수동형 독자가 아니라 생산형 독자들을 발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영세 출판사 입장에서는 좋은 기획거리가 있어도 돈이 없어서 대충 책을 펴내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북펀드가 자금난에 시달리는 출판계에 활력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번역자들은 저자 중 한 명인 파타고니아의 빈센트 스텐리 이사를 초청해 오는 11월 2일 강남교보문고에서 간담회를 연다.임정식 기자 dad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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