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센 히어로즈 외야수 유한준(34)은 오랫동안 꾸준하게 정상급 활약을 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지난 해 최고의 시즌을 만들었으나 박병호 강정호 이택근 서건창 그늘에 가렸다. 주축선수임에는 분명한데 히어로즈를 대표하는 선수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난 시즌부터 시작해 올해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20일 현재 타율(4할4리)과 장타율(7할8푼7리), 출루율(4할7푼7리) 1위, 최다안타(55개) 2위, 타점(41개) 3위, 홈런 공동 3위(12개)다. 유일한 4할 타자이고,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 최상위권에 올라 있다. 현 시점에서 가장 뜨거운 타자, 가장 뛰어난 타자다. '준수했지만 특별하지 않았던' 히어로즈 외야수 유한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유한준을 만났다. 낮 12시에 경기장에 나온 유한준은 훈련에 앞서 일찌감치 웨이트 트레이닝을 마친 상태였다. 그는 외국인 타자, 후배들의 성장에 따른 위기감이 자신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야구가 잘 되는 이유? 위기감 때문이다.
지금 골든글러브 투표를 한다면, 외야수 부문 1위는 틀림없을 것 같다.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의 외야수, 경쟁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다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단지 지금 성적이 좋고 운이 따라 기록상 앞서갈 뿐이다"고 했다. 평범하다 못해 밋밋한 대답이다. 그래도 수비수가 좋은 외야수를 꼽아달라고 했더니, 롯데 자이언츠 베테랑 임재철(39)을 끌어들여 "내가 선배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고 했다. 유한준은 매사에 신중했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자신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KBO 리그에서 외야 수비가 가장 견실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유한준이다.
현대 유니콘스, 히어로즈 주축 외야수로 활약했는데,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2014년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타자가 들어왔다. 유한준은 주전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변화로 이어졌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주전 자리를 위협받은 정도가 아니라 백업으로 2014년 시즌을 시작했다. 이렇게 가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에 다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히어로즈는 지난해 세명의 외야수, 외국인 선수 비니 로티노와 이택근 문우람으로 시즌을 열었다. 잠재력을 인정받은 문우람(23)이 유한준의 자리인 우익수로 치고올라왔다.
트레이닝과 타격기술, 정신적인면 모두 주위에 조언을 구했다. 그래도 통렬한 자기반성이 먼저였다.
"이전에 주전으로 뛸 때도 나는 수비는 그런대로 한다고 쳐도 특징있는 타자가 아니었다. 3할 타자도 아니고, 2할9푼에 홈런 9개 정도를 친 선수였다. 팀 내 입지는 좁아지고 나이가 들어가는데, 이대로가면 안 되겠다 싶었다."
외국인 선수와 경쟁하기 위해 몸부터 만들었다. 이지풍 트레이닝 코치와 함께 식단을 짜고 체질을 바꿨으며, 강도높은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필요한 근육을 키웠다. 유한준은 "(기술적인 면에서)변화를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기초적인 틀을 바꿨다. 감히 말하자면, 2013년까지 나만의 그 무엇이 없었다. 컨디션이 좋으면 (안타를)치고, 안 좋으면 못치는 타자였다"고 했다.
유한준은 이어 "타격에서 1에서 10까지 연결동작이 있다면, 1,2가 안 되는데 5.6,7,8,9,10을 하려고 했다. 엘리베이터도 2,3,4층으로 올라가려면 1층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술적인 포인트는 영업비밀이라 밝히기 어렵지만, 타격 매커니즘에서 나만의 노하우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심재학 타격코치는 유한준을 보자 "잘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나한테 떠넘기지 말고 니가 직접 해라. 다들 나한테 물어본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염경엽 감독은 "결과를 바꾸려면 생각을 바꾸라"고 했다. 마음에 딱 와 닿는 말이었다.
"결과를 받아들이는 용기가 부족했다. 잘 맞은 타구가 라인드라이브로 잡히거나 호수비에 걸렸을 때, 볼이라고 생각한 공이 스트라이크 판정이 났을 때 마음속에서 통제가 안됐다. 겉으로 표출은 했지만 속으로 그런 게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부족했다."
야구 잘 하려면 단순해 져라. 야구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유한준은 지난 타석, 아쉬운 결과를 쉽게 놓지 못했다. 잘 때린 공이 수비수에 잡히면 '빠졌어야 했는데'하고 아쉬워했다. 투 스트라이크에서 투수가 잘 던진 공을 못 치면 '왜 못 쳤을까' 미련을 가졌다. 이걸 버리니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지고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유한준은 타율 3할1푼6리, 20홈런, 91타점을 기록했다.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다.
▶FA 효과? 달라진 건 주위 시선밖에 없다.
자유계약선수(FA)는 오랫동안 꾸준하게 활약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축복같은 선물. 2005년 프로가 된 유한준은 올시즌을 부상없이 채우면 FA가 된다. 다들 FA 효과를 말한다. FA를 앞둔 선수가 몸값을 높이려고 페이스를 끌어올려 일시적으로 성적이 오르는 현상 말이다. 정말 그런걸까.
유한준은 FA 얘기가 나오자 허탈하게 웃었다. "달라진 건 주위의 시선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97경기에 나서 타율 2할7푼2리, 7홈런, 40타점을 기록한 2013년을 나락으로 떨어진 시즌으로 기억했다. 그는 "나락으로 한 번 떨어지고 나서 얻은 게 있다. 잘해야지, (FA가 돼) 얼마를 받아야지, 이런 생각은 사치다. 쫓아가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해부터 매게임이 도전이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하고 있다"고 했다.
유한준은 FA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담스러워 했다. 규정을 다 채우고 시즌이 끝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그에게 히어로즈는 '나를 키워준 팀'이고 '야구 열심히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 팀'이다. 유한준은 "히어로즈가 나를 잡아줬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30대 중반에 찾아온 전성기. 선수마다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나이가 다른데, 유한준은 지금이 그 때라고 했다. 롱런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유명한 맛집을 보면 그 집만의 노하우가 있다. 야구선수도 나이를 떠나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느냐없느냐의 차이가 큰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찾으면 수퍼스타가 되는 것이고. 늦었지만 노하우를 찾은 것에 만족한다."
지난 겨울에 강정호가 메이저리그로 떠났다. 모두가 강력한 5번 타자의 공백을 걱정하고, 공격력 약화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유한준은 "혼자 잘하려고 하지 말고 조금씩만 더 하자고 했다. 정호가 지난해 홈런 40개를 쳤는데, 나머지 선수가 4개씩 더 치면 40개가 된다는 얘기를 선수들끼리 했다"고 말했다.
▶등번호 61번? 특별한 의미가 있다.
등번호 61번. 많은 야구팬들이 박찬호를 떠올릴 것이다. 유한준에게 혹시 박찬호가 특별한 선배일까? 아무 상관이 없다. 유한준은 2010년 6월 1일에 태어난 딸 하진이 생일을 등번호로 했다. 2011년부터다. 딸 사랑, 가족 사랑이 담긴 등번호 61번. 가족 얘기를 하면 팔불출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또 딸 하진이가 불필요하게 외부에 노출되는 게 걸려 공개하지 않았다고 했다.
유한준은 앞에 나서는 유형의 선수가 아니다. 얼굴 전체에 '성실' '신뢰'를 써붙이고 다니는 것 같다. 심재학 타격코치는 "우리 팀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열심히 하는 선수다. 고참인데도 더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놀랍다"고 했다. 부드러운 성격이다보니 '근성'과 '카리스마'와 거리가 있어보인다. 주장 이택근(35)에 이어 야수 서열 2위. 팀과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베테랑에게 바라는 역할이 있다.
'강력한 리더십이 아쉬워 보인다'고 하자 그는 "천성인 것 같다. 후배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필요하기도 하고, 좋은 면도 있지만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선배도 있으면 좋지 안을까. 이게 타고난 내 스타일이다"고 했다.
후배들이 조언을 구하면 꼭 해주는 말이 있다. "빨리 잊어버려라"다. 4타석에서 삼진 4개를 당하더라도, 다음 경기에서 4안타 칠 수 있는 게 야구다.
"너는 왜 10번의 기회에서 10번을 다 치려고 하나. 세상에 그런 타자는 없다." 유한준 지난해 1군 타격코치였던 허문회 코치가 해준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는 "7번의 실패가 따라올 수밖에 없는데 10번을 다 잘 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 내려놓으니까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했다. 뻔한 설명, 선문답처럼 들리는데 은근히 울림이 있다. 이제 이 말을 후배들에게 해주고 있다.
"출발이 좋아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기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목표를 정해놓고 숫자를 따라가면 잘 안 되는 스타일이다. 야구장에 나와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다."
KBO 리그 최고 타자는 끝까지 겸손했다.
목동=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