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뛰어가고, 한국은 서 있다."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게 바로 미화하거나 회피해선 안되는 현실이다. 스스로 '아시아의 맹주'라 자부하면서도 야구대표팀의 운용에 관한 철학과 비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사안이 눈앞에 닥쳐야 허겁지겁 힘을 끌어모아 그럴듯한 결과만 만든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이후 10년간 이어져 온 한국 야구대표팀 운용 방식의 실체다.
올해 말로 예정된 '프리미어 12'대회를 치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대회가 5개월 앞으로 다가왔는데 구체적으로 갖춰진 건 아무것도 없다. 대표팀 선발 기준이나 코칭스태프, 감독 등은 논의만 되고 있다. 이미 고쿠보 히로키 대표팀 전임감독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하고, 올해 초부터 대표팀 구성을 거의 마친 일본에 비하면 손놓고 멍하니 서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시아의 맹주'다운 여유일까. 아니다. 엄밀히 말해 이건 자만이자 현실판단 미스다.
▶대표팀 전임감독제, 미룰 이유가 없다
기본적으로 '전임감독제'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한국 야구대표팀의 운용시스템이 주먹구구식이라는 걸 드러낸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팀을 이끄는 자리다. 온전히 그 일에 집중하고, 강한 팀을 구성해 나라의 명예를 높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표팀만을 위한 감독을 뽑아서 전권을 줘야 하는게 맞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야구대표팀은 이런 식으로 운용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축구와 달리 야구국가대표팀이 치러야 할 경기가 그리 많지 않다는 데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야구는 국가차원의 이벤트가 축구에 비해 현저히 적고, 더구나 올림픽에서도 정식종목에 제외된 상태다. 이런 이유로 한국 야구대표팀 감독은 큰 이벤트가 결정된 후에야 급하게 선임되곤 했다. 대부분 현역 프로야구팀의 감독이 맡았다. 2009년부터는 '한국시리즈 우승팀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맡는다'는 이상한 원칙이 만들어져 시행돼 왔다.
그러나 실제로 2006년 WBC 이후 거의 매년에 걸쳐 야구도 국제적 이벤트가 펼쳐졌다. 2006년말 도하 아시안게임. 2008 베이징올림픽, 2009 WBC,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2013 WBC, 2014 인천아시안게임 등 야구대표팀이 출전한 대회는 줄줄이 이어졌다. 비록 올림픽 정식종목에서 제외됐지만, 재진입을 위한 노력이 활발하고, 그에 따라 국제대회도 향후 더 많이 치러질 가능성이 크다. 올해 말에 열리는 '프리미어 12' 대회도 그 일환이다. 따라서 '국제대회가 적어 대표팀 전임감독이 필요없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
더불어 '한국시리즈 우승팀=대표팀 감독'의 공식도 합리적이지 않다. 대표팀은 대표팀 나름의 운용방식과 철학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일년 내내 소속팀의 우승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 온 감독에게 또 다른 팀을 맡기고 좋은 성적을 내라고 하는 건 몰지각한 일이다. 지금껏 이런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대표팀을 구성해왔음에도 국제대회에서 한국야구가 좋은 성적을 낸 건 그야말로 기적같은 일이다. 그 기적을 이뤄낸 김인식, 김경문, 조범현, 류중일 감독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기적에 따른 성적은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다. 근본적인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감독과 선수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통해 만든 성과이기 때문. 실제로 대표팀을 맡아 좋은 성적을 낸 감독들의 소속팀은 다음 년도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07년의 한화 이글스와 2010년의 KIA 타이거즈가 좋은 예다.
또한 대표팀에 차출돼 힘을 쏟은 선수들도 이후 부상등으로 슬럼프를 겪었다. 2006년 이후 매번 대표팀에서 역투한 류현진(LA다저스)이 최근 어깨수술을 받은 것도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한 후유증이라는 설명이 많다. 때문에 이제는 정교한 시스템을 구성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성적을 내는 게 한국야구의 발전을 위한 길이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 시초는 대표팀 전임감독제에서 출발한다.
▶전력 질주하고 있는 '라이벌' 일본 야구
한국이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야구대표팀을 운용하는 동안 '라이벌' 일본은 냉철하게 시스템을 만들어왔다. 출발은 역설적으로 WBC와 베이징올림픽 등에서 한국에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2006 WBC 때는 오사다하루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의 김인식 감독과 맞붙었다. 그러나 한국에 2패를 당하고 쑥스런 우승을 차지했다. 2008 베이징올림픽은 카리스마 넘치는 '명장'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이끌었지만, 김경문 감독의 한국대표팀에 완패하며 금메달을 놓쳤다.
이런 수모를 통해 일본은 '전임감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사무라이 재팬'으로 통하는 일본 야구대표팀만의 색깔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가 고쿠보 히로키(44) '야구대표팀 전임감독'이다.
다이에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고쿠보 감독은 2012년 말 현역 은퇴 후 NHK 방송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 2013년 11월에 일본 야구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됐다. 당시 42세. 일본 야구계와 팬들은 젊고 리더십 넘치는 새 대표팀 전임감독을 환영했다. 2012년부터 대표팀을 상설화 한 일본야구기구(NPB)가 은퇴 후 1년 밖에 지나지 않은 40대 초반의 감독을 파격적으로 선택한 이유. 바로 '사무라이 재팬의 새로운 시작에 걸맞는 젊은 카리스마'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 야구계는 고쿠보 감독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고쿠보 감독은 아마추어 야구계까지 아우르며 현재까지 강력한 추진력으로 일본야구 대표팀 수장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미 올해 1월부터 각 구단의 스프링캠프를 시찰하며 대표팀 후보군을 체크했고, 2월16일에 이를 토대로 한 '사무라이 재팬' 명단을 발표했다. 3월에는 유럽 대표와 평가전도 치렀다. "프리미어 12에서 일본야구의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목표 달성을 위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다.
▶한국 야구 코칭스태프 '드림팀'도 가능하다
그런데 잠깐만 생각해보면 한국도 얼마든지 전임 감독제를 만들어 운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역대 최강의 코칭스태프를 구성할 수 있다. 강한 코칭스태프를 만들어 시간을 주고 대표팀을 구성하게 하면 일본 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떤 나라의 대표팀과 만나도 밀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기본적으로 현재 지휘봉을 놓고 있는 명감독들이 많다. 우선적으로 이미 WBC에서 한국 야구의 위상을 높인 김인식 현 KBO 기술위원장을 생각할 수 있다. 연륜과 리더십으로 볼때 대표팀 전임감독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그 밑으로 김재박 김시진 이만수 선동열 김진욱 한대화 이순철 등 무수히 많은 레전드 출신 전직 감독들이 있다. 이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 KBO 경기운영위원이나 방송해설 등으로 변신해 활발히 활동 중이다. 또 이들보다 한 세대 밑으로는 이종범 박재홍 정민철 등이 있다. 일본의 고쿠보 감독 사례처럼 '파격'을 원한다면 이들이 대안이 될 수도 있다.
면면을 보면 한 팀을 이끌 코칭스태프로는 차도고 넘친다. '드림팀'도 얼마든지 된다. 이를테면 이런 조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감독 김인식-수석코치 선동열-투수코치 김시진-타격코치 한대화-수비코치 김재박-배터리코치 이만수-불펜코치 김진욱-주루코치 이순철'. 역대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코칭스태프다. 물론 위치의 변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김인식 감독이 총감독을 하고, 감독자리에 김재박 감독이나 이만수, 선동열 등을 앉히는 그림이다. 아예 파격적으로 이종범이나 정민철을 내세우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코칭스태프 드림팀'이 만들 수 있는 효과는 무궁무진하다. 물론 야구를 코칭스태프가 하는 건 아니지만, 일찍 구성원이 갖춰지면 대표팀 선발을 더욱 철저히 할 수 있다. 더불어 강한 조직력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크다. 게다가 이런 '코칭스태프 드림팀'의 구성을 통해 국민적인 관심도도 크게 키워낼 수 있다. 새로운 대표팀의 이미지와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결국은 의지의 문제다. 각 구단 대표로 구성된 KBO 이사회에서 결의만 하면 된다. 비록 현재는 서로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전임감독제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고 있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보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지엽적으로 각자 팀의 이득만 생각할 게 아니다. 그렇게 미적대는 사이에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일본은 벌써 앞서가고 있다. 미리부터 지고 들어가는 게임은 승산이 없다. 이제는 망설여선 안된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