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김표향 기자] 영화 '암살'의 마지막 총성이 스크린을 찢을 듯 날카롭게 울려퍼진다. 변절자를 처단하고 1000만 관객을 저격한 총구의 뒤로, 시대의 비극이 할퀴고 간 '얼굴' 하나가 오롯이 새겨진다. 관객들은 그제야 깨닫는다. 이름 없이 산화해간 독립군들의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잊혀진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상해임시정부의 청년 독립군 '명우'는 16년의 시간이 흐른 후 모두가 잊고 있던 마지막 '임무'를 완수한다. 명우는 '역사를 기억하자'고 말하는 이 영화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한 조각 퍼즐이다.
배우 허지원은 말갛고 선한 얼굴 안에 독립을 꿈꾸는 청년 명우의 순수한 열망을 담아냈다. 명우를 만나게 된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 생각하고, "광복절에 1000만 돌파했다는 것이 감격스럽다"는 이 신인배우는 '암살'과 함께 잊지 못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친일파 암살단을 조직한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정재)의 오른팔 명우. 허지원은 지금도 명우의 첫 대사를 기억한다. 안옥윤(전지현)을 만나러 간 만주 독립군 근거지에서 경계병에게 "안옥윤 대장은 왜 상관을 쐈냐"고 물으며 호기심을 드러내던 대사다. 연극 동료들 앞에서 수도 없이 연습했지만 카메라 앞에서 설렘과 긴장을 떨칠 수 없었던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바짝 얼어붙은 막내에게 선배들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엔딩은 부담감에 엔지가 많이 났는데 이정재의 격려에 힘을 냈다. "이정재 선배에게 많이 배웠어요.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과 자세를 보며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평소에도 허리를 곧게 세우고 계시는데, 저희끼리는 몰래 '척추요정'이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정말 멋있는 분이에요."
이정재 옆에서도 기죽지 않은 허지원의 패기는 최동훈 감독이 눈여겨본 그것이다. 20대 남자배우들이 거의 다 지원했다는 명우 역에 이름도 얼굴도 낯선 허지원이 캐스팅된 이유다. "연습도 정말 많이 하고, 목숨 걸고 오디션 봤어요. 2차 오디션에서 감독님을 만났는데, 시간이 지나서도 생각이 나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기다려달라고 하셨죠. 혹시 탈락하더라도 못해서 그런 게 아니니까 용기 잃지 말라고도 하셨는데, 저는 그 말씀만으로도 큰 자신감을 얻었어요. 간절히 바라기는 했지만 제게 그렇게 엄청난 기회가 주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믿고 따랐던 염석진의 총에 맞은 명우는 극을 떠났다가 다시 염석진 앞에 나타난다. 명우가 배신감에 몸을 떨며 버텼을 시간을 상상하며 허지원은 눈빛을 날카롭게 벼리고 또 벼렸다. 확 달라진 그의 모습에 엔딩의 그 저격수가 청년 독립군 명우라는 걸 미처 짐작하지 못한 관객도 많았다. "저 사람 누구냐고 궁금해하는 댓글과 그에 대해 '명우'라고 답해주는 댓글이 기억에 남아요."
신스틸러로 인상적인 활약을 남긴 허지원은 사실 준비된 배우다. 중학교 때까지는 축구를 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꿈을 접은 뒤 고교 연극부에서 활약하며 서울청소년연극제 무대에 올랐다. 연기를 반대하던 아버지도 고교 2학년 때 허지원이 내민 상위권 성적표에 마음을 돌렸다. 실력파가 즐비한 한예종 연극원도 한번에 붙었다. 졸업 후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면서 단편영화와 독립영화로 차근차근 실력을 다져왔다.
"제가 스타들처럼 외모가 뛰어난 게 아니잖아요. 실력을 갈고닦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 대학동기들과 극단을 꾸렸죠. 김윤석, 송강호, 최민식 선배처럼 나이 들어서도 멋있게 연기하는 게 꿈입니다. 앞으로 연극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제게 주어진 기회에 감사해하면서 관객을 만나고 싶어요."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