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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슈틸리케, 누가 맡든 박수를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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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이게 참 요물이다.

좋은 기억은 추억으로 저장된다. 하지만 나쁜 기억은 트라우마가 된다. 반복되면 두터운 방어기제를 만든다. 유독 소통이 잘 안되는 사람을 들여다보면 십중팔구 크고작은 트라우마가 있다.

A대표팀 사령탑은 감독의 무덤이다. 차범근, 조광래, 최강희, 홍명보까지 한국축구의 대표 명장들이 상처를 입었다. 기억은 멀수록 희미하고 가까울수록 또렷하다. 가깝게는 직전 월드컵 홍명보 감독의 상처 사례가 있다. 당연히 두려움도 크다. 게다가 이번에는 상황마저 최악이다.

우물에 독이 있었다. 누군가 죽었다. 우물 안에 독이 사라졌는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두려움에 선뜻 먼저 마시려는 자가 없다. 이러다 모두 목말라 죽을 판이다. 이 때 씩씩하게 첫 바가지에 입을 대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살신성인. 2경기를 남긴 대표팀 감독직 자리가 꼭 그렇다.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다. 두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잘해야 본전, 못하면 낭떠러지다.

월드컵 본선 진출은 이미 매일 먹는 밥이 된지 오래다. 무려 8회 연속 진출, 1986년 멕시코월드컵 부터니 벌써 30년이 넘는다. 비 일상성, 희소성이 뉴스가치라는 측면에서 본선 진출 실패가 훨씬 더 큰 뉴스다. 남은 2경기 잘못 치러 본선진출이 좌절된다고 생각해보자. '원흉'으로 얼마나 큰 주목 받겠는가. 카타르전 패배로 실제 탈락 가능성은 50%는 된다.

반대 상황을 가정해보자. 남은 2경기를 잘 치러 9회 연속 본선진출을 달성했다손 치자. 그 공이 모두 대타 감독에게 돌아올까? 본선 탈락 시에는 결과만 중요하지만 본선 진출 시에는 내용도 중요하다.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지 못한 채 반 어부지리로 진출하면 감독의 공은 크게 없다. 그렇다면 짧은 시간 내 대표팀을 환골탈태 시켜야 하는데 이건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운명의 최종 9,10차전까지는 채 100일도 남지 않았다.



둘째, 끝나가는 드라마의 '대타' 주인공이다.

이제 최종예선과 본선은 사실상 다른 드라마가 됐다. 슈틸리케 주연의 최종전이 크게 히트를 쳤다면 자연스럽게 월드컵 본선으로 이어지는 시즌2 드라마 제작으로 이어졌겠지만 연기력 부족으로 시청률이 급락하며 주인공 슈틸리케는 중도하차를 앞두고 있다. 급히 대타를 구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이 드라마는 자칫 조기종영을 할 정도로 엉망이 돼 있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드라마에 전도유망한 인기배우들(신태용, 홍명보, 최용수 등)이 선뜻 몸을 던지기는 쉽지 않다. 결과와 관계 없는 차기 작품 출연 무조건 보장 같은 파격적 제안이 없는한…. 허나 이 역시 공염불이 될 위험이 있다. 잘못 출연했다 진짜 조기종영하면 시청자들에게 미움을 사 여론 재판으로 약속된 차기작 출연이 불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 딜레마라고 한다. 최선은 이미 없다. 차선만이 남아 있는 상황. 누구에게든 이번 대표팀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다. 희생의 각오 없이 몸을 맡길 수 없다. 그러니 욕하지 말자. 그냥 최선을 다해보라고 박수를 보내주자. 카타르전을 마치고 귀국한 대표팀 주장 기성용이 그랬다. "선수도 사람이다 보니 (언론과 여론의) 비난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고…. 부담감이란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겠지만 실제 태극전사의 몸놀림은 정상이 아니었다.

신임 감독도 마찬가지다. 부담이 가뜩이나 큰데 부임도 하기 전에 비난과 욕으로 도배를 하면 그는 과연 무엇을 할수 있을까. 허둥지둥 대다 진짜 벼랑 끝으로 차를 몰 수도 있다. 어떤 감독이 새로 오든 그는 정말 큰 결심을 한거다. 일단 박수를 보내자. 장점에 집중하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자. 혹시 아는가. 고래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벼랑 끝 한국축구를 살려낼지. 객관적 평가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