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정현석 기자]꼭 필요한 순간의 활약. 베테랑의 존재 이유다.
두산 베어스 100승 투수 유희관(35). 세월의 바람에 흔들리지만 쓰러지지는 않는다. 오뚝이 같은 정신력으로 팀의 막판 스퍼트에 힘을 싣고 있다.
부침이 있지만 팀이 가장 어려웠던 순간, 문득 '그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잠실 삼성전 초반 대량실점 이전까지 유희관은 2연승을 달렸다.
지난달 19일 키움전 6이닝 무실점 역투로 대망의 개인통산 100승 달성. 부담을 덜어낸 유희관은 24일 KIA전에 5이닝 2실점(1자책)으로 연승을 달렸다.
외인 투수 워커 로켓이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 천금 같은 베테랑의 귀환이었다. 만약 유희관이 없었다면 선발 로테이션에 비상이 걸릴 뻔 했다.
100승 달성 이후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모습.
김태형 감독은 '유희관이 대기록 달성 후 심리적 부담을 덜어낸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본인은 (새로) 109승을 노리고 있던데? 새로운 목표 그만 잡고 부담없이 하지"라며 껄껄 웃었다. 중요한 순간 선발 로테이션을 듬직하게 지켜주는 유희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묻어나는 농담. 부담을 훌훌 털고 모든 경험을 쏟아 붓길 바라는 마음이 숨어있다.
김 감독은 "100승 하기까지 부담감이 많이 있었겠죠. 아무래도 100승 하고 마음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싶네요"라며 "투수는 마운드에 올라가면 어떻게든 잘 던져서 이기려고 하니까"라며 끊임 없는 새로움을 향한 베테랑의 투지를 높게 평가했다.
투수 나이 환갑이 훌쩍 지난 시점. 사실 지금처럼 버티는 것 만해도 대단한 일이다. 한국 나이로 어느덧 서른여섯.
얼핏 강속구 투수가 더 많은 체력이 필요할 것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유희관 처럼 정교한 제구를 바탕으로 눌러 던지기 위해서는 하체 밸런스와 악력, 유연성 등이 떨어지지 않도록 끊임 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부단한 노력이 있기에 아직도 유희관이란 이름 석자를 여전히 1군 선발 마운드 위에 올려놓고 있는 셈.
프로야구 선수로서 아쉬움 없이 이룰 걸 다 이룬 백전노장.
눈 앞의 목표가 없다면 세월의 마모 속에 당장이라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걸음을 멈춰도 무방하지만 유희관은 또 한번 새로운 도전을 택했다. 1993년 장호연이 달성한 구단 프랜차이즈 역대 최다승 기록인'109승'. 자신을 채찍질 하기 위한 상징적 수치다.
유희관의 의미 있는 도전은 야구를 떠나 우리 삶 속의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던진다.
늘 유머러스 하고 밝은 선수. 웃음 뒤에는 남들이 모르는 고통 속 찡그림도 있다. 단짠 맛 처럼 묘하게 조화된 기쁨과 고통이 현재의 유희관을 만든 원동력이다.
매 시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 모를 가을야구. 선발 마운드에 설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미란다 최원준 로켓 등 확실한 선발 투수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시리즈 직행이 아닌 짧은 단기전부터 시작해야 될 가능성이 높은 시즌. 아무래도 확률은 떨어진다.
김 감독도 "(포스트시즌에) 가봐야 알겠지만 내가 부임한 뒤 6년째 가을에 선발 등판해 썩 좋았던 적은 없는 것 같다"며 부정적 뉘앙스가 담긴 미소로 답했다.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충분히 노력하고 의미 있는 성과를 낸 선수. 무엇보다 타고난 강한 어깨가 없는 투수 꿈나무들에게 '느린 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이정표를 세운 투수다.
그의 황혼기는 결코 화려할 필요는 없다.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노을 처럼 잔잔한 아름다움. 매 순간이 감동이자 기적이다. 유희관이 꿈꾸는 현재의 모습이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