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르=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나라 튀르키예.
여행자들은 에페소스의 폐허에서 각 시대를 수놓았던 찬란한 흔적들과 마주하게 된다.
로마의 돌기둥 사이를 거닐다 보면, 귀를 울리는 장대한 교향곡이 들려오는 듯하다.
하지만 이즈미르 바닷가의 작은 어촌마을에선,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사람들이 빚어낸 조용한 소나티네가 들려온다.
이스탄불을 지나, 에게해 바람을 맞으며 남쪽으로 향하면 고대 이오니아 문명의 중심지가 나타난다.
◇ 에게해의 진주, 이즈미르
에게해를 접하고 있는 이즈미르(Izmir)는 오랜 항구 도시로서의 풍미가 넘쳐난다.
튀르키예 서부에 위치한 제3의 도시로, 고대에는 '스미르나'로 불렸다.
이즈미르 항구 또한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지어졌다.
도시 중심의 코낙 광장에는 1901년 세워진 '이즈미르 시계탑'이 우아하게 서 있고, 그 옆으로 작은 모스크와 오래된 시장 케메랄트 바자르가 이어진다.
향신료, 은세공, 직물, 가죽 그리고 터키 전통찻집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이 시장은, 에게해의 숨결을 머금은 살아 있는 생활 문화 박물관이다.
언덕 위에서 해안을 조망할 수 있는 아산쇠르(Asansor) 전망대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붉은 지붕과 반짝이는 바다 그리고 황혼의 빛으로 물든 도시 풍경이 내려다보인다.
이즈미르가 '에게해의 진주'로 불리는 이유는 단지 위치 때문이 아니라, 이곳이 고대 문명이 오가는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지어진 항구가 한눈에 보인다.
◇ 고대 도시의 숨결 가득한 에페소스
이즈미르에서 차로 1시간가량 달리면 서양 문명의 가장 깊은 흔적과 조우할 수 있다.
에페소스(Ephesus)는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인들이 세운 도시로, 로마 제국 시대에는 소아시아의 수도로 번성했다.
한때 약 20만명이 거주하던 이 도시는 지금도 거대한 야외 박물관처럼 살아 있다.
에페소스는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일행들을 압도했다.
이곳은 로마 제국의 품 안에서 번영하며 지중해 세계의 지적·상업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에페소스 유적의 가장 큰 강점은 보존 상태의 완벽함이다.
많은 건축물이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 외형과 구획, 거리의 구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실제로 이곳을 걷다 보면 '유적지'가 아니라 '고대 도시 한복판'을 걷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가장 인상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로마 시대 만들어진 수도 시설이 곳곳에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붉은 토기로 빚은 상수도관이 묻혀 있거나 무너진 것을 따로 정리해 놓은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서기 117년에 지어진 셀수스 도서관(Celsus Library)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당시 1만 권 이상 장서를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면은 지금도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고대 로마의 건축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수세식 공중화장실, 시장, 공동주택, 신전, 거리의 석판까지 이 모든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생생히 증언한다.
또한 이곳에는 고대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다.
지금은 복원된 기둥 하나만이 남아 있지만, 그 위용은 여전히 상상력 너머로 서 있다.
에페소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비극적 사랑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시저 사후 후계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와 권력을 쟁취하려던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전쟁 준비를 벌이던 곳이기도 하다.
둘은 기원전 31년에 일어난 악티움 해전을 앞두고 이곳에서 병력을 정비했으나 결국 해전에서 대패, 둘 다 각기 다른 곳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박물관 앞에서는 로마인 복장을 한 행렬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클레오파트라 분장을 한 배우 옆에 있는 남자가 안토니우스일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던 그들의 운명을 생각하니 카리스마 넘치는 그들의 모습도 안쓰러워 보였다.
◇ 돌담, 바람, 그리고 식탁…알라차트
이즈미르에서 차로 1시간 거리. 에게해 바닷바람을 따라 도착한 알라차트는 마치 엽서 속 장면을 떠올릴 만큼 아름답다.
그리스풍 석조 주택들과 알록달록한 나무 셔터, 진한 핑크빛 부겐빌레아가 흐드러진 골목은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풍경이다.
거리는 차량 통행이 거의 없어 고양이와 자전거, 여행자와 주민이 골목을 공유한다.
알라차트는 오랜 세월 그리스계 튀르키예인들의 마을이었다.
이곳의 집과 거리, 정원 문화는 여전히 그 영향을 품고 있다.
돌로 지은 집들은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골목마다 창문에는 레이스 커튼이 펄럭이고, 정원 안에는 감나무와 허브가 자라고 있다.
제철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내는 골목길의 식당들, 작은 손뜨개 가게, 향신료 상점, 그리고 직접 담근 잼을 파는 할머니가 있는 시장까지, 알라차트는 뭔가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기보다 과거의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마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밤이 되면 마을은 더욱 고요해진다.
골목 곳곳에서 기타 소리나 잔잔한 대화가 흘러나오고, 여행자들은 와인 한 병과 함께 테라스에서 시간을 태운다.
이곳에서는 '볼거리'보다 '머물 자리'가 더 중요하다.
◇ 성벽 안의 고요한 항구…스아지크
스아지크는 조금 더 소박하고 내밀한 마을이다.
이즈미르 남쪽에 있는 이 마을은 터키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됐으며, 그 기조를 지금까지 소박하게 지켜내고 있다.
마을의 중심에는 고대 도시의 성벽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골목마다 주민들이 손수 만든 수세미, 자수 수건, 라벤더 주머니, 수공예 비누 등을 담은 바구니를 문 앞에 내놓는다.
정겨움이 상품보다 앞선다.
일요일이면 성벽 안 작은 광장에서 일요 시장이 열린다.
이곳은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가 아니라, 마을 전체가 하나의 잔치처럼 변하는 날이다.
직접 빚은 파이, 시큼하지만 구수한 냄새가 나는 염소젖 치즈, 수제 포도잼, 올리브 절임이 가지런히 놓이고, 골목에 놓인 테이블에서는 누군가 튀르키예식 팬케이크를 굽고 있다.
현지인과 여행자가 같은 속도로 걷고, 같은 그늘에서 찻잔을 기울인다.
항구로 내려가면 오래된 나무 보트와 고깃배와 요트가 잔잔한 바다 위에 흔들린다. 햇살이 수면 위에 별처럼 흩어진다.
그 바다를 마주한 돌담 끝에 앉아, 차를 한 잔 마시는 일. 그것 하나로 하루가 완성된 느낌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8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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