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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는 여전히 수많은 중국인에게 존경받고 있다. 그는 대체로 20세기 동안 중국이 세계 강국으로 부상하는 장기적인 과정을 시작한 창시자 혹은 설계자라는 긍정적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에서 마오쩌둥에 충성심을 보였다거나 정치적 목표보단 보신을 우선시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마오쩌둥의 충실한 개"(역사가 프랑크 디쾨터)라는 평가와 함께 "위선적", "이기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저우언라이는 1921년 봄 공산당 입당 후 단 한 번도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적이 없었다. 이는 마오쩌둥조차 달성하지 못한 일이었다. 부침 많은 정치권력의 세계에서 그는 1등은 되지 못했지만 늘 2등은 유지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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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는 어린 시절부터 출중했다. 그는 톈진에 있는 난카이 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을 거쳐 프랑스에 가 공산당의 주요 간부가 됐다. 국공합작 시절에는 황푸군관학교에서 정치부 주임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당시 교장은 국민당의 이인자 장제스(蔣介石)였다. 장제스도 성실하고 꼼꼼한 저우언라이를 신뢰했다. 그러나 쑨원(孫文)의 사망으로 국공합작이 깨지자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하이로 이동해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정보 총괄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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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서 마오쩌둥의 가장 큰 문제는 매우 야심 차고, 의심이 많으며, 주관적이고,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당 및 군대 지도자들은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길 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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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는 장제스가 마오쩌둥처럼 비범하게 야심 차고 다루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했다. 또한 그의 모든 동지중에서 야망과 책략에서 장제스와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마오쩌둥임을 알았다. 장제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마오쩌둥을 그의 편에 두어야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오쩌둥보다 돋보여선 안 됐다…. 만약 그가 마오쩌둥의 지도력과 정책 노선에서 벗어난다면, 언제든지 마오쩌둥에게 공격받거나 심지어 정치적 종말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이 두려움이 생애 마지막 날까지 저우언라이를 괴롭힐 것이었다."
고령의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끝까지 후계자로 고려하지 않았다. 류사오치(劉少奇), 린뱌오(林彪), 왕훙원(王洪文), 덩샤오핑, 화궈펑(華國鋒) 등을 후계자로 내세웠고, 또한 이들을 축출하거나 재등용하면서 교묘하게 권력을 운영했지만, 저우언라이만은 평생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만큼은 끝내 내치지 못했다. 그가 없이는 정부가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행정의 달인이었다.
저우언라이가 죽고, 마오쩌둥도 곧이어 사망하면서 저우언라이의 후계자 덩샤오핑이 권력을 차지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혁명적 노선을 폐지하고, 저우언라이의 실용주의와 현대화 전략을 계승했다. 죽기 전 저우언라이는 제4차 전국인민대회 연설에서 중국이 "산업, 농업, 국방, 과학기술 네 가지 영역에서 현대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덩샤오핑은 이를 따랐다.
이성현 옮김. 1천68쪽
이성현 옮김. 1068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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