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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 전 두산 코치가 숨졌다. 스스로 목을 맸다. 화려했던 '92학번' 빅3의 프로 인생은 어둡기 그지 없었다
가장 먼저 사라진 '넘버3', 손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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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로 간 임선동은 대학 졸업 후 법정 소송으로 1년을 보냈다. 1995년 6월 실업팀 현대피닉스와 계약금 7억원에 입단하기로 했다 계약을 파기하고 10월 일본프로야구 다이에 호크스(현 소프트뱅크)와 계약을 맺었다. 당시 고려대의 조성민이 요미우리에 입단하며 한국 최초로 일본프로야구에 직행하자, 조성민과 비슷한 계약조건으로 일본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고교 졸업 시 1차 지명을 해 지명권이 있었던 LG가 일본행에 제동을 걸었고, 법정 소송 끝에 1997년 LG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법원은 '프로 입단 후 2년 뒤 원하는 구단으로 트레이드를 요청할 수 있다'는 조정안을 내 임선동은 야구규약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계약기간 2년짜리 선수'가 됐다.
LG와의 불편한 동거가 끝난 임선동은 99년 1월, 현대 유니폼을 입는다. 투수 안병원과 현금 7억원을 주고 받는 트레이드였다. 2000년 18승을 올리며 다승왕에 오르며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을 회복하나 싶었지만, 2001년 14승, 2002년 8승으로 내리막을 걸었다. 급기야 2003년부터는 1승도 거두지 못했고, 2007시즌 후 은퇴했다.
화려하고 시끄러웠던 '넘버2' 조성민 가장 먼저 눈을 감다
손경수가 짧은 프로생활을 마감하던 그 해, 조성민은 졸업반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조성민은 일본프로야구의 명문 요미우리와 계약금 1억5000만엔(약 18억원) 연봉 1200만엔(약 1억4000만원)의 대형계약을 맺었다. 계약기간은 무려 8년이었다. 2학년을 마치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박찬호에 이어 두번째로 해외에 직행한 케이스였다. 일본프로야구 직행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큰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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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엔 마무리 보직에서 밀려났지만, 공백이 생긴 선발로테이션에 진입해 전반기에만 15경기서 7승6패 평균자책점 2.75를 기록했다. 완투가 6차례나 됐고, 완봉승도 3번이나 있었다. 빛나는 활약으로 올스타까지 뽑혔지만, 그 한 경기가 발목을 잡았다.
올스타전에서 투구 도중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입고 수술과 재활로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2000년(1승)과 2002년(2승) 잠시 재기의 날개를 펴나 싶었지만, 2002시즌을 마친 뒤 계약기간 1년을 남기고 자진퇴단했다.
조성민은 2003년과 2004년엔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 신청서를 내고 참가했다. 하지만 어느 구단의 지명도 받지 못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야구해설가로 활동하던 2005년 한화 김인식 감독의 부름으로 한국프로야구에 입문했지만, 3년간 3승4패 4홀드 평균자책점 5.09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긴 채 2007년 말 스스로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2011년부터 2년간 두산 2군에서 재활, 불펜코치로 활동했지만, 2013시즌을 앞두고 재계약이 불발됐다.
'풍운아' 조성민은 1998년 전반기 요미우리에서 남긴 강렬한 모습보다는 톱스타 故 최진실과의 결혼과 이혼, 이와 연관된 사생활 문제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2013년 1월6일, 스스로 목을 매 생을 마감했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