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척=스포츠조선 고재완 기자]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 마주쳤는데, 얼굴에 미안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더라고요. 불러서 위로를 할까 하다가 그냥 두었습니다. '오늘 마운드에 올라가면 네가 직접 몸으로 이겨내 봐라' 하고 속으로 믿은 거죠."
실패의 아픔을 스스로 털어내고 일어설 때, 비로소 진짜 투수가 된다. 두산 베어스 김택연(21)이 단 하루 만에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김원형 두산 베어스 감독은 5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키움 히어로즈와의 원정 경기를 앞두고, 직전 2경기 동안 극적인 드라마를 쓴 필승조 김택연에 대한 솔직한 속내를 털어놨다.
김택연은 이틀 전이었던 3일 키움전에서 고개를 숙였다. 5-4로 앞선 7회말 1사 1루 위기 상황에 등판해 깔끔하게 이닝을 정리했으나, 8회말 안타 3개를 사정없이 얻어맞으며 2실점, 결국 5-6 역전패의 뼈아픈 빌미를 제공하고 패전 투수가 됐다. 자신의 부진으로 인해 팀의 승리가 날아갔다는 미안함이 투수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김 감독은 "4일 원정 숙소에서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복도에서 택연이와 딱 마주쳤다. 인사를 하는데 얼굴에 팀을 향한 미안함이 가득하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일부러 긴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냥 가볍게 웃어만 줬다. 속으로는 '오늘 또 위기 상황이 오면 네가 직접 마운드에서 깨부수고 이겨내라'고 생각했다.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지듯, 스스로 극복해야 진짜 자기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의 믿음은 통했다. 김택연은 바로 다음 날인 4일 키움전에서 곧바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7-4로 앞선 7회말, 앞선 투수 이용찬이 안타와 사구로 무사 1, 2루 위기를 자초한 뒤 김택연이 마운드를 물려받았다. 김택연은 맷 데이비슨에게 볼넷을 내주며 무사 만루를 허용했으나, 후속 타자 케스턴 히우라와 베테랑 안치홍을 완벽한 구위로 압도하며 연속 탈삼진을 솎아냈다. 이어 박찬혁을 가볍게 유격수 땅볼로 요리하며 실점 없이 이닝을 지워버렸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지워낸 두산은 결국 8-5로 승리하며 전날의 패배를 완벽하게 설욕했다.
김 감독은 "선발 투수는 경기 중에 1~2점을 줘도 제 몫을 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타이트한 상황에 올라오는 불펜 투수들은 단 1점도 주면 안 된다는 강박과 부담 속에 마운드에 오른다"라며 "간혹 성격이 대단히 뻔뻔해서 털어버리는 선수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점하고 팀이 지면 미안한 마음에 엄청나게 힘들어한다"고 불펜의 숙명을 짚었다.
그러면서 김택연이 가진 멘탈을 극찬했다. 김 감독은 "택연이는 마운드 위에서 확실히 강단이 있다. 19살 나이 때부터 곧바로 마무리 중책을 맡았고, 올해 벌써 프로 3년 차 투수다. 지난 2년 동안 그를 단단하게 만든 자양분이 된 것 같다. 이제는 위기가 와도 스스로 통제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라며 대견해했다.
고재완 기자 star77@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