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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배우 김시은(34)는 눈 깜짝할 새에 피어오르는 화려한 꽃은 아니지만 조금씩 싹을 틔우고 공들여 꽃봉오리를 만들며 잔잔한 향을 피우는 야생화 같은 배우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기보다는 들어오는 물을 보며 숨을 고를 줄 알고 꾸준히 노를 젓는 숨겨진 원석 김시은. 내공 만렙인 그가 영혼을 녹이고 뼈를 갈아 넣은 인생작으로 다시 한번 스크린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특히 '빛과 철'은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독립영화계 전도연'으로 등극한 김시은의 새로운 인생작으로 꼽히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앞서 김시은은 2014년 영화 '군도'(윤종빈 감독)로 데뷔한 이후 '귀향'(16, 조정래 감독)에서 위안소 탈출을 계획하는 정민(강하나)의 조력자 분숙 역, '사자'(19, 김주환 감독)에서 수녀 데레사 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고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김은숙 극본, 이응복 연출)에서는 글로리 호텔 직원 귀단 역으로 시청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비단 상업 작품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로 큰 주목을 받은 이후 다시 독립영화 무대로 돌아온 그는 노동 문제를 청춘 멜로 속에 녹여낸 '내가 사는 세상'(19, 최창환 감독)에서 내일을 꿈꾸기 힘든 청춘 시은 역으로 많은 관객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했다.
이렇듯 단역과 주연,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영화와 드라마, 시대극과 현대물 등 규모와 장르를 불문하고 뚝심 있는 연기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연기파 배우로 충무로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김시은은 2년 만의 스크린 컴백작 '빛과 철'을 통해 다시 한번 '인생캐' 경신에 성공했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불행의 바닥으로 내려쳐진 희주를 연기한 김시은은 끊임없는 불안과 이명, 짓눌린 삶에서 도망치려던 순간, 낯선 아이 은영(박지후)이 찾아와 건넨 말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인물을 완벽히 소화해 '빛과 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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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렵고 고민이 많았던 지점이 많았다. 영화 속에서 희주가 못난 행동을 많이 한다. 어쨌든 후반부 사건의 비밀이 밝혀지는데 개인적으로는 초반부터 모든 관객을 이해를 시키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연기하기 너무 어려웠다. 희주라는 캐릭터를 관객이 공감을 못 할까봐 걱정했다. 그런 고민이 큰 와중에 배종대 감독이 '희주는 관객의 공감을 얻으려고 만든 캐릭터가 아니다'라고 정의했다. 그 한 마디가 연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배종대 감독이 주인공인 희주 캐릭터를 과감하게 만든 것이다. 오히려 그래서 더 매력 있게 다가온 것 같다. 배종대 감독의 말을 듣고 마음의 짐을 좀 덜었다. 이야기의 이해는 관객의 몫이고 내가 관객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관객까지 이해시키려는 것은 나의 욕심이었다. 이후 연기하는 데 수월했다"고 곱씹었다.
감정의 진폭이 컸던 작품이었던만큼 후유증도 컸다는 김시은은 '빛과 철'을 끝낸 뒤 6개월의 휴식기를 가졌다. "인물이 처해진 상황이 괴로웠고 끝나고 나서도 여운이 남아 잠시 휴식을 가졌다. 그 때 쉬었던 휴식기가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마음을 많이 회복했고 그 덕에 다음 작품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그때 잠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작품을 이어갔다면 작품이 고통이고 그 고통이 또 다른 고통이 됐을 것 같다"며 "물론 '빛과 철'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작품 중 하나였지만 배우 김시은의 인생에서 큰 변화를 준 작품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설명한다면 나를 뒤흔든 작품인 것 같다. 내 스스로는 내면의 밭을 갈아엎는 느낌이다. 내 마음의 밭을 뒤짚어 엎어서 그 당시에는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갈아 엎고 좋은 휴식을 취한 뒤 돌이켜 보면 건강한 작용으로 남은 작품이 된 것 같다. 고통으로 끝난 게 아니라 좋은 방향이 됐다"고 의미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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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로 떠오른 염혜란과 호흡도 인상적이었다는 김시은. 앞서 염혜란은 '빛과 철' 인터뷰 당시 "김시은과 첫 대면에서 장면적으로도 긴장해야 했고 김시은이란 배우 자체가 '독립영화계 전도연'으로 불리고 있는 만큼 센 이미지가 있어 더 긴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허당 매력이 많더라. 현실에서 봤을 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연기할 때 집중력이 좋고 그 마스크가 너무 좋다. 이 영화는 '김시은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의 연기가 너무 좋고 조용한데 단단하고 폭발력이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시은은 '빛과 철'에서 영남 역의 염혜란과 호흡을 맞춘 것에 대해 "혜란 선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좋은 배우라고 알고 있었다. 혜란 선배는 영화, 드라마 전 연극부터 시작하셨는데 그때 연기하신 작품을 두 편 본 기억이 난다. 작품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혜란 선배가 연기한 연기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미 연극 무대 때부터 좋은 배우라는 걸 알고 있었고 혜란 선배의 초창기 드라마 작품인 tvN '디어 마이 프렌즈 때도 선배의 연기를 보고 알았다"고 답했다.
이어 "염혜란 선배가 인터뷰 때 너무 좋은 칭찬을 해주셔서 감사하다. '빛과 철' 때 상대 배우가 염혜란 선배라는 소식을 듣고 정말 많은 기대를 했다. 역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연기를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을 때보다 더 내공이 깊은 배우라는 걸 '빛과 철' 작품을 함께 하면서 느꼈다. 마치 조용한 호랑이가 염혜란 선배 안에 있는 것 같다. 내공이 깊은 사람들을 보면 보통 아우라가 있다고 하지 않나? 혜란 선배도 그랬다. 좋은 의미로 무서웠다. 평소에는 굉장히 푸근하고 따뜻하고 온화한 선배인데 연기할 때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온다. 그 안에 정말 조용한 호랑이가 사는 것 같다. 이번 작품을 함께 해 너무 영광이다"고 마음을 전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빛과 철'에서 염혜란 선배와 많이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어 아쉽기도 했다. 일단 캐릭터상 희주와 영남의 관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고 배종대 감독 역시 이런 감정선을 유지하길 바랐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지만 그런 가운데 조심스럽게 염혜란 선배에게 ''빛과 철'이 쉽지 않다. 어려운 것 같다. 이번에는 정말 힘들다'며 넌지시 푸념을 털어놨는데 '어려운 작품일수록 좋은 연기가 나온다'라는 말을 해줬다. 그 말이 기억이 남는다. 내가 이 작품에서 좋은 연기가 나왔다기 보다, 또 염혜란 선배가 나에게 엄청난 조언이나 가르침을 줬다기 보다는 그 따뜻한 말 한 마디가 굉장히 위로와 응원이 됐다. 염혜란 선배의 한마디였지만. 선배의 그런 연기 생활과 경험들이 우러러나오는 액기스 한방울과 같은 조언이었다"고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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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실제로 이 수식어를 바꿔달라고 홍보팀에 부탁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너무 민망해 '전도연' 선배 대신 '보석'이나 '원석'으로 바꿔주면 안되겠냐고 부탁했지만 바뀌지 않더라.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게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지금은 영화계에서 예쁘게 봐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여 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민망하다"며 "김시은이라는 배우가 '제2의 누구'로 불려지는 것도 영광이지만 언젠가는 오로지 나로서 받아들여지는 날도 오길 바란다. 그렇게 조금씩 차곡차곡 밟아 나가면 언젠가 대중도 '김시은'이라는 이름 석자를 알아주지 않을까란 희망도 있다"고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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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 사진=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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