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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이병헌은 미쳤고 유아인은 개탄스럽다. 진수성찬으로 상다리 부러지게 그득그득 차려놓은 밥상 '승부'를 이병헌이 정성스레 입에 넣어줬지만 그걸 뱉는 것은 물론 대차게 엎어버린 유아인이다. 유아인은 선배 이병헌에게 평생을 다해도 못 갚을 마음의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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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는 스승 조훈현과 제자 이창호의 숨 막히는 대결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대결이 펼쳐지기까지 과정의 심연을 깊고 섬세하게 들여다 봤다. 열 살 나이로 전주에서 바둑 신동으로 불렸던 어린 이창호(김강훈)를 단번에 알아본 조훈현은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그를 길러냈다. 바둑의 정석, 예우도 몰랐던 이창호는 눈앞의 승부욕에 들끓는 어린 아이 그 자체였지만 조훈현의 가르침으로 무섭게 성장한다. 사나운 기세로 공격하는 조훈현과 달리 끈질기게 참고 인내하는 이창호는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스승 조훈현에게 맞서지만 조훈현은 늘 "정석이 아니다"며 다그치기 일쑤. 듣도 보도 못한 수로 바둑판을 흔드는 이창호가 못마땅한 조훈현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은 대국에서 제자에게 충격의 패배를 맛보면서 반전을 맞는다.
바둑 신동을 넘어 바둑을 모독하는 괴동(怪童)으로 불렸던 이창호가 한국 바둑계 독재자이자 황태자 조훈현을 이기자 세상은 발칵 뒤집어졌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은 되바라진 제자라며 세상은 비난을 쏟아냈고 전설의 패배를 차마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패배를 받아들인 건 조훈현 뿐이었다. 자신은 초심을 잃었기에 지는 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스승의 몰락과 자신의 재능 사이에서 어찌할 바 몰랐지만 엄연히 하늘의 태양은 이창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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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승부'의 타이틀롤인 이병헌은 조훈현을 꼭꼭 씹어 삼키고 완벽히 소화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둑의 신'에 접신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병헌의 신명 난 칼춤은 그가 대체불가한 '영화계의 국수(國手)'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조우진이 시사회에서 언급했듯 '승부'는 이병헌의 타이틀 방어전이었던 것.
괴동 유아인은 부족함 없는 열연으로 '승부'의 무게추를 맞췄다. 늘상 입꼬리가 내려간, 돌부처 같은 무표정의 이창호로 완벽히 변신한 유아인은 활활 타오르는 불 같은 이병헌과 달리 파동 없는 물의 잔잔함으로 균형을 맞췄다. 물오른 연기 천재의 추락이 더욱 안타깝고 원망스러운 이유다.
이병헌과 유아인뿐만 아니라 '승부'의 조훈현과 이창호를 둘러싼 신 스틸러의 활약도 눈부시다. 조훈현의 오랜 벗이자 바둑 기자 천승필 역을 맡은 고창석은 물론 이창호와 족보가 꼬인 이용각 프로 기사 역의 현봉식, 조훈현과 이창호의 친밀한 동반자이자 조훈현의 든든한 아내 정미화 역의 문정희까지 이따금 마음 뜨끈한 웃음 포인트를 선사하며 일당백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병헌과 '내부자들'(15, 우민호 감독)에서 강력한 케미를 펼친 조우진의 특별출연도 빼놓을 수 없다. 조훈현과 희대의 라이벌로 손꼽혔던 서봉수 프로 기사를 모티브로 한 '승부'의 살리에리 남기철을 연기한 조우진은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조훈현을 각성하게 만드는 각성제로 등판, 숨 막히는 '승부'에 사이다 감칠맛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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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하고 실망스러운 유아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지옥 같은 터널에 갇혔던 '승부'는 이제 작품의 진정성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물론 관객은 역대급 마약 스캔들로 세상을 발칵 뒤집었음에도 항소심까지 진행, 끝내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구속 5개월 만에 석방된 유아인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없다. 스크린을 통해 마주해야 할 유아인의 말간 얼굴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하지만, '승부'는 유아인이 전부인 영화가 아니다. 이병헌의 신들린 연기와 모처럼 영화 보는 맛을 느끼게 하는 탄탄한 스토리와 연출, 스크린에서만 느껴지는 농밀한 미장센을 유아인이란 핸디캡으로 외면하기엔 '승부'에 쏟은 많은 영화인의 피땀눈물이 아깝다. 가까스로 뭍에 발을 내디딘 '승부'가 관객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으며 지난한 극장가, 한국 영화에 춘풍(春風)을 불어넣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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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