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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우리는 다른 것을 드러내는 용도로 빛을 사용하지만 저는 빛 자체를 드러내고 싶습니다."
터렐은 1960년대부터 일관되게 빛과 공간을 이용해 인간의 지각(인지)을 바꾸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작업해 왔다. 대학에서 인지심리학과 수학을 공부했고 18세에 조종사 자격증을 딴 것, 명상과 정신적 수련을 중시하는 퀘이커교도라는 점이 그의 작업에 영향을 미쳤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해 준 '네 안의 빛을 찾아라'는 말도 평생에 걸친 빛 탐구 여정의 길잡이가 됐다.
천정에 뚫린 구멍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s), 공간 속에서 시시각각 빛의 색이 변하는 '간츠펠트'(Ganzfelds) 시리즈 등이 대표작이다. 국내에는 강원도 원주의 뮤지엄 산에 '스카이스페이스'와 '간츠펠트' 등 설치 작업 5점이 상설 전시돼 있다.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터렐은 11일 기자들과 만나 빛에 대한 생각을 들려줬다.
그는 "미술의 역사에서 빛을 묘사한 작가들이 정말 많았지만 나는 빛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빛 자체를 다루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빛이 있다고 했을 때 어떻게 이것을 만들어내고 받아들여지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나무나 돌은 깎아낼 수 있고 찰흙은 빚을 수 있고 쇠는 용접할 수 있지만 빛은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요. 1967년에 빛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시작했죠. 처음에는 네온 조명과 전기 저항 소자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발광다이오드(LED)와 컴퓨터를 통해 그런 것들을 더욱 잘 이뤄낼 수 있게 됐죠. 이런 기술들이 나올 때까지 오래 살 수 있어 무척 다행입니다."
빛을 이용한 그의 설치 작업은 명상적이면서 때론 낯선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빛이 변화했을 뿐인데 주변의 공간이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 묘한 기분에 빠져들기도 한다. 터렐의 작업을 접하고 어지럼증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터렐은 이를 두고 빛을 통해 인식이 전환되는 경험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작품 안에서 느끼는 혼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지를 깨닫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현실을 어떻게 구축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라며 "그래서 인식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파일럿이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비행기의 어떤 수치에만 의존해야 하거나 스키를 타는 사람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화이트 아웃 상태에서 방향을 감지하는 것, 바다에 들어간 다이버가 공기의 움직임을 보고 위와 아래를 인식하게 되는 것처럼 지평선이 상실된 공간 안에 머무를 때 오히려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죠. 비행기를 탔을 때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처음에는 구토하기도 하지만 그런 감각에 스스로를 맡기고 머무르게 되면 오히려 본인의 감각을 더 잘 깨닫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 작품 속에서도 어지럼증이 느껴진다고 하지만 작품 안에서 좀 더 시간을 가지고 머무르면 긍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터렐은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한 조각의 빛을 전달하는 것이고 빛 자체의 경험을 전달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빛이 가지고 있는 사물성(thingness) 자체도 중요하다"며 "터렐의 작품을 소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거기에 대한 답은 '당신은 이곳을 지나는 빛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고 설명했다.
전시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의 존재를 조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신작 '웨지워크'(Wedgeworks)를 국내에서 처음 공개한다. 교차 투사되는 평면의 빛을 통해 공간이 물리적 경계를 넘어 확장되는 듯한 몰입감을 주는 작품이다. 20분간 빛의 색이 변하는 작업으로, 갤러리 측은 "빛의 색이 변하는 '웨지워크'는 3점뿐이며 국내에는 처음 공개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무한한 깊이감을 환영처럼 연출하는 '글라스워크'(Glassworks) 시리즈 작품도 2점 설치된다.
터렐은 1977년부터 미국 애리조나 북부의 화산 분화구에서 '로든 크레이터'(Roden Crater)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40만년 된 화산의 분화구 내에 24개 관측 공간과 6개의 터널을 지어 맨눈으로 천체를 관측하고 터렐의 빛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다. 현재 6개 공간이 완성됐고 공사가 계속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로든 크레이터 프로젝트의 공중 사진, 관측 공간의 모형, 부지 계획 청사진 등을 소개한다.
그는 한국의 문화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터렐은 "지금 한국의 문화는 어쩌면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문화로 부상하고 있다"며 "K팝과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까지 모두 경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 27일까지. 무료 관람이지만 네이버 예약을 통해 예약해야 한다. 이미 8월 중순까지 토요일 예약은 마감됐다. 관람객이 명상하는 듯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길 바라는 작가 의도에 따라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zitrone@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