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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1883년 국기로 제정됐으나 1949년에야 양식 통일
"변화무쌍한 태극기, 항일의 긴박함·절실함 담고 있어"
(서울=연합뉴스) 이승연 기자 = '광화문 광장에 붙은 태극기의 4괘(四卦)가 잘못 그려진 것 같아요."
안양시에 거주하는 60대 방모 씨는 지난 5일 TV를 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광화문 교보빌딩에 걸린 '남상락 자수 태극기'가 화면에 나왔는데, 4괘 중 물을 상징하는 감(坎)괘와 불을 상징하는 이(리·離))괘가 뒤바뀌어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방씨는 6일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손주가 태극기를 좋아해서 함께 자주 그렸는데, 딱 봐도 괘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며 "어떻게 틀린 태극기를 걸 수 있나"라고 말했다.
이처럼 '남상락 자수 태극기'를 보며 방씨와 같이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건곤감리(乾坤坎離) 청홍백 3(건)4(리)5(감)6(곤)'으로 상징되는 현재의 태극기는 1949년에야 양식이 통일됐다.
◇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태극기는 모양이 제각각
'남상락 자수 태극기'는 독립운동가 남상락(1892∼1943) 선생이 독립만세 운동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남 선생이 1919년 4월 충남 당진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부인과 함께 손바느질로 제작한 태극기다. 남 선생의 부인이 직접 짠 명주에 홍색·청색·검은색 실을 수놓아 만들어 더욱 희소한 가치를 지닌다.
남 선생은 이 태극기를 들고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뭔가 '어색한' 태극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서울 한복판에 걸린 또 다른 태극기는 4괘가 아예 그려지지 않아 눈길을 끈다. 바로 중구 서울도서관에 걸린 '안중근 혈서 태극기'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1명의 항일 투사와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왼손 약지를 자른 뒤 그 피로 태극기에 건곤감리 대신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쓴 혈서 태극기를 남겼다.
이후 안 의사는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고, 이듬해 사형을 선고받아 순국했다. 작년 12월 개봉한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처단 여정을 다뤘다.
또 대한제국기 의병장 고광순이 을사늑약 체결 이후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을 담아 만든 불원복(不遠復) 태극기는 표준 태극기의 사괘를 180도 뒤집은 모양을 한 것이 특징이다.
음(파랑)·양(빨강)이 좌우로 배치된 태극기도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평양숭실학교에 걸린 태극기는 4괘의 배치가 다를 뿐 아니라 빨간색 양방이 오른쪽, 파란색 음방이 왼쪽에 그려졌다.
이러한 세로형 태극 문양은 1923년 상해 임시정부 시절 사용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에서도 볼 수 있다.
◇ "독립운동하며 기억으로 그려낸 태극기"
이처럼 태극기의 모양이 제각각인 것은 표준화된 태극기 제작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극기는 1883년 국기로 제정된 이후 현재와 같은 형태로 통일되기까지 66년이 걸렸다.
태극기의 기틀을 닦은 것은 1882년 9월 일본으로 간 외교사절 박영효였다.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깃발로 태극 문양과 4괘로 구성된 도안을 그렸고, 이듬해 고종은 이 도안을 국기로 제정했다.
다만 구체적인 제작 방법을 명시하지 않으면서 60여년간 다양한 변형이 일어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데니 태극기'는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19세기 태극기만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회오리와 같은 역동적인 태극 문양과 푸른색으로 표현된 괘가 특징이다.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가 소장한 이 태극기는 1890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 파리 박람회의 삽화에 그려진 태극기는 음방과 양방이 좌우로 배치됐을 뿐 아니라 4괘가 열십(十)자 방향으로 배치돼있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도 표준제작법 공백 장기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작법을 공표할 주체도 없는 데다, 일제는 태극기를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처벌할 만큼 강도 높은 제재를 했다.
국민들은 기억 속 태극기의 이미지를 되살려 손수 태극기를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괘의 배열이나 태극 문양의 방향, 색채 표현 등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전 수석연구위원은 "3·1운동 때 태극기를 그렸던 것은 주로 학생들인데, 어렸을 때 언뜻 봤던 태극기를 어떻게 정확히 그릴 수 있었겠나"라며 "몰래 갖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대부분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고 말했다.
재직시절 수십개의 태극기를 감정했다는 그는 "괘가 서 있는 것도 있고, 누운 것도 있고 태극기는 참 다양하다"며 "변화무쌍한 태극기는 그렇게 그려질 수밖에 없었던 긴박함, 절실함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래원 국기홍보중앙회장도 "아무도 태극기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으니 어디서 듣거나 본대로 그리면서 그 모양이 모두 달라진 것"이라며 "기억을 통해 그려낸 태극기야말로 가장 순수한 정답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 "독립운동 현장에 늘 같이 있던 태극기"
태극기의 제작법이 통일된 것은 해방 이후 1949년 국기시정위원회가 국기제작법 고시를 발표하면서부터다.
당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태극기의 국기 채택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태극기의 정확한 도안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을 뿐 아니라 태극 문양·괘의 의미를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 망국의 흔적이라는 인식 등이 걸림돌이었다.
그럼에도 태극기가 한국을 대표하게 된 데에는 일제강점기에 부여된 상징성이 큰 역할을 했다.
강길원 전북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태극기를 향해 '낡은 것', '과거의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우리 국민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깃발로서 그 의미가 너무도 컸다"고 말했다.
김 전 수석연구위원도 "북한이 새로운 국기를 채택한 만큼 남한도 굳이 태극기를 국기로 채택할 이유는 없었지만 독립운동의 역사를 함께했던 태극기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태극기는 3·1운동을 비롯해 모든 독립운동의 현장에 같이 있었으며,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우리 민족의 상징"이라며 "좌우를 막론하고 태극기는 독립의 상징으로서 국기로 채택되기에 충분했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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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kite@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