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전주=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국립창극단을 포함해 150명이 넘는 출연진이 만든 '심청'이 지난 13일 저녁 '2025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으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막을 올렸다.
극본과 연출을 담당한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 연출가 요나 김, 박인건 국립극장장, 전주세계소리축제 이왕준 조직위원장이 뜻을 모아 길고 고된 작업 끝에 완성한 '심청'의 목표는 '딸들의 비극 끝내기'이었다.
'심청' 설화를 '효'를 강조하는 교훈적 스토리가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며 끝없이 되풀이되는 원형적 비극으로 본 요나 김은 극의 설정을 현대적으로 뒤집어 놓았다. '오늘, 이곳'의 관객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9개의 서사 장면을 재창조해냈다. 요나 김에게 가장 의미 있는 각색은 심청이 황후가 돼 영광과 행복을 누린다는 '고난에 대한 보상' 콘셉트를 과감히 삭제한 것이다.
공양미 삼백 석을 덜컥 약정한 철없는 심 봉사에 분노한 심청이 아버지의 목을 조르려는 장면, 원래의 '해피엔딩 피날레'인 눈뜨는 장면 뒤에 심 봉사 보란 듯이 인당수의 죽음을 되풀이시키는 장면 등은 관객들에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장 힘없는 존재인 미성년 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적 폭력의 고리를 끊겠다는 연출가의 단호한 의지가 담긴 장면이었다.
이미 국립오페라단의 '팔스타프'과 '돈 카를로'로 한국 관객에게도 호평받은 헤르베르트 무라우어의 무대디자인은 넓은 모악당 무대를 효과적으로 분할해 몰입도를 최대한으로 높였다. 공간의 넓이와 높이를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바꾸는 슬라이딩 도어 무대는 냉정하고 도회적인 팔크 바우어의 의상디자인과도 잘 어울렸다.
런웨이 형태의 돌출무대를 중앙에 두고 그 양쪽으로 무대를 분할했고, 동시에 심 봉사가 반복적으로 아내의 장례식 꿈을 꾸는 내실 공간과 그 앞쪽의 외부공간도 나눴다. 중앙 런웨이 왼쪽에 고수와 국악 타악기 주자들을 배치하고 오른쪽에 가야금, 거문고 등 현악기들을 배치한 것도 객석에서 음악과 극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게 하는 효과적인 장치였다.
국립오페라단의 '탄호이저'에 이어 벤야민 뤼트케의 라이브 카메라는 인물들의 내면을 파고들며 서사의 전복에 정점을 찍었다. 사회의 집단적인 폭력과 무관심에 찢기고 피 흘리고 망가진 심청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다만 관객의 이해를 도우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필요 이상으로 라이브캠이 자주 쓰였다는 점은 아쉬웠다.
이번 공연의 또 다른 중요한 성공 요소는 음악이었다. 작창 및 음악을 책임진 한승수 음악감독의 역량이 빛났다. 핵심 판소리 눈대목은 그대로 살리면서 필요한 장면에 양악을 적절히 배합해 극적 효과를 키웠다. 2천 석 모악당을 울리며 관객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한 국악 타악기 연주의 효과도 감탄할 만했다.
심청 역의 김우정, 심 봉사 역의 유태평양, 세련된 뺑덕어멈 역의 이소연은 탁월한 가창뿐만 아니라 이번 '심청'에서 새롭게 설정된 현대적 역할에 완전히 녹아든 연기를 펼쳐 관객을 설득했다. 그 밖의 조역들 및 합창에 참여한 출연진 모두 연출 의도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연기를 펼쳤다.
휴식 시간을 포함해 거의 3시간이 걸린 긴 공연이었지만, 극장에 입장할 때 들린 파도 소리부터 행인들과 출연진의 흥미로운 인터뷰, 객석 뒤편에서 소리를 지르며 무대 앞쪽으로 달려 내려온 60명이 넘는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어린 심청, 15세 심청, 노파 심청을 무대에 등장시켜 관객이 반복되는 희생과 수난의 역사를 실감하게 하는 발상도 돋보였다. 마지막 9장에서 깜빡이는 가로등을 수리해 온전한 빛을 가져다주는 심청은 눈이 있어도 진실을 보지 못하는 세상을 말없이 개안시키는 영웅의 모습이었다.
후드 티를 걸친 채 극장 밖으로 나가 모악당 앞길을 걸어가는 심청의 마지막 영상은 어떤 시련 속에서도 죽음을 딛고 끝없이 태어나는 심청의 저력을 보여주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요나 김에 의해 새롭게 쓰여 질 '흥보가'나 '수궁가'가 기대되는 이유다.
rosina0314@naver.com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