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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혁명은 범유럽적 격동"…신간 '혁명의 봄'

기사입력 2025-09-05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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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벽에선 구정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닥에 배설물이 고여있어 악취가 진동했다. 방안에는 곰팡이가 피고 곧 부서질 듯한 침대 서너 개가 끈으로 묶여있었고, 세간이라곤 물레 하나와 베틀 하나가 전부였다.

에밀 졸라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음울한 풍경이다.

하지만 실제 모습이다. 프랑스 낭트의 의사 앙주 게팽과 외젠 보나미가 1836년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거리와 집 풍경을 묘사한 글이다.

당대 계급을 8개로 분류했는데 게팽과 보나미는 그중 많은 자녀를 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이렇게 소개했다. 반면 최상층 부르주아는 자식이 적고(평균 2명), 10~15개의 방, 12~15개의 높고 넓은 창문이 달린 최고급 아파트에 거주했다고 설명했다. 빈부 격차는 극심했고, 그로 인한 사회 혼란도 더해가고 있었다.

대혁명(1789년)이 끝나고 난 뒤 프랑스 사회는 다시 보수로 회귀했으나 혁명의 기운이 다시 군불을 때고 있었다. 양극화는 심화했고, 공산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민주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퍼져나가면서 귀족과 부르주아가 쌓아놓은 권위는 흔들렸다. 종교의 역할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시대의 혼란을 비집고 혁명이라는 거대한 에너지가 분출할 구멍을 찾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케임브리지대 역사학과 교수가 쓴 '혁명의 봄'(책과함께)은 1848년 혁명을 깊이 있게 분석한 역사서다. 저자는 1848년 혁명을 "전 지구적 차원에 걸친 범유럽적 격동이었다"고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1848년 2월 혁명은 세계 곳곳을 자극했다. 그해 2월 프랑스에서 시작된 격동은 들불처럼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는 빈에서 달아났고, 프로이센군은 베를린에서 철수했으며, 덴마크·나폴리 국왕은 헌법을 공포했다. 귀족들은 도망쳤고, 광장은 혁명의 열기로 타올랐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얼싸안았다.

"나는 그저 혈기를 가라앉히고 심장 박동을 늦추기 위해 겨울 추위에 밖으로 나가 지칠 때까지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심장이 전에 없이 방망이질을 쳐서 마치 가슴팍에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다."(독일의 한 급진주의자)

혁명가들은 이주, 망명, 여행, 공동투쟁, 비밀 결사 등을 통해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면서 국제 공조를 추구했다. 이 때문에 혁명은 파리와 베를린뿐 아니라 스위스, 시칠리아, 나폴리, 이탈리아 북부, 로마, 독일 연방,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베리아반도 등으로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이처럼 모든 일이 쉽게 흘러가는 듯했지만, 곧 위기가 찾아왔다. 계급 간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달콤했던 만장일치는 계급 간의 격렬한 투쟁으로 넘어갔다. 독일 중부와 남부, 프랑스 서부와 남부, 로마 등에선 급진주의자들이 주도한 봉기가 일어났다.

저자는 "사회적 권리, 빈곤, 노동할 권리를 둘러싼 문제는 1848년 여름 동안 혁명을 갈가리 찢어놓았다"고 진단한다.

이 같은 혁명 세력의 분열 속에 구세력들이 하나둘 돌아오면서 혁명은 결국 좌초했다. 유럽에서 시작해 호주를 거쳐 남미 각국까지 상륙한 1848년 2월 혁명의 불길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1848년을 경험한 보수주의자들은 이전의 보수주의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보수주의자였던 프로이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1848년 발생한 변혁의 순간이 없었다면 자기 경력은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각국 행정부와 자치단체의 주요 자리를 진보주의자들이 차지했다. 1848년 이후 보나파르트파가 지배한 프랑스에서 도지사의 3분의 1 이상이 급진주의자 출신이었다. 1849년 7월부터 오스트리아 내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폰 바흐도 민주투사 출신이었다.

저자는 1848년 혁명이야말로 전 세계에 영향을 준 범유럽적 혁명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혁명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칠레의 저술가 겸 역사가 벵하민 비쿠냐 마케나가 쓴 회고록 구절을 인용한다.

"1848년의 프랑스 혁명은 칠레에서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태평양 연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가난한 식민지 주민들에게 역사상 그토록 칭송받은 1789년 혁명은 우리의 어둠 속에서 한차례 반짝인 섬광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반세기 후 그 쌍둥이 혁명은 눈부신 광채로 손색이 없었다. 우리는 그것이 오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연구했고, 그것을 이해했고, 그것을 동경했다."

책과함께. 1348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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