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빛의 그저, 빛] 송은이, 157억 빌딩보다 값진 것

입력

SBS 금토드라마 '사마귀' 제작발표회가 4일 서울 목동 SBS사옥에서 열렸다. MC 송은이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목동=박재만 기자 pjm@sportschosun.com/2025.09.04/
SBS 금토드라마 '사마귀' 제작발표회가 4일 서울 목동 SBS사옥에서 열렸다. MC 송은이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목동=박재만 기자 pjm@sportschosun.com/2025.09.04/

※<정빛의 그저, 빛> 한국 예능의 위상이 글로벌로 뻗어 나가는 지금, 정빛 기자가 반드시 비추어 보아야 할 '예능 스타'를 환하게 조명합니다.

[스포츠조선 정빛 기자] "언니, 나 정말 뜬금없이 녹화 하루 전날 밤에 잘렸어."

어느 날 밤, 후배 김숙의 이 청천벽력 같은 하소연을 들은 여자가 있었다. 남초 예능의 거센 홍수 속에서 개그우먼들이 설 자리를 잃고, 데뷔 20년이 넘은 자신마저 1년 반 동안 '사실상 백수'로 지내야 했던 가혹한 시절. 여자는 위기 앞에서 남을 탓하는 대신 단단하게 맞받아쳤다.

"그럼 잘리지 않게 우리가 방송을 만들자." 대한민국 예능계에 '콘텐츠 제작자'라는 위대한 패러다임을 제시한 인물, 송은이의 거대한 전설이 시작된 순간이다. 송은이가 좌절 대신 '판'을 새로 짜기로 결심하면서 예능사의 물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유튜브 채널 '정상훈 비정상훈' 영상화면 캡처
유튜브 채널 '정상훈 비정상훈' 영상화면 캡처

지금은 직원 수만 약 50명에 달하는 콘텐츠 기업의 수장이자 번듯한 상암동 신사옥의 주인으로 불리지만, 송은이의 출발은 그야말로 맨땅의 헤딩이었다. 2015년 4월, 사재를 털어 단 4명(송은이, 김숙, 직원 1명, 작가 1명)으로 시작한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은 한국 1세대 연예인 뉴미디어 콘텐츠의 효시였다.

'비밀보장'은 시작 5주 만에 반응을 얻었고, 곧 광고도 붙었다. 그 해 11월에는 SBS 러브FM 라디오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변방으로 밀려났던 두 사람이 변방 그 자체를 무대의 중심으로 바꿔놓은 것.

그도 그럴 것이, '비밀보장' 기획력은 언제나 대중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냈다. "레드오션에서 살아남으려면 초반에 힘을 정말 많이 줘야 한다"는 송은이의 지론대로, 철저한 소통과 무해한 가치를 앞세웠다.

또 "유익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무해한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철학은 송은이 콘텐츠의 핵심이다. 요즘처럼 자극 경쟁이 심한 시대에 송은이는 조회수보다 가치라는 단어를 꺼낸다. 그래서 비보 콘텐츠를 보면 독설보다 공감이, 경쟁보다 연대가 먼저 흐른다.

제1회 청룡시리즈어워즈가 19일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여자예능인상을 수상한 '셀럽은 회의 중'의 셀럽파이브가 소감을 전하고 있다 인천=최문영 기자 deer@sportschosun.com/2022.07.19/
제1회 청룡시리즈어워즈가 19일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렸다. 여자예능인상을 수상한 '셀럽은 회의 중'의 셀럽파이브가 소감을 전하고 있다 인천=최문영 기자 deer@sportschosun.com/2022.07.19/

무엇보다 송은이의 위대한 리더십은 자산 가치 157억 원에 달하는 상암동 신사옥 규모에 있지 않다. 그가 일군 빌딩의 가치보다 눈부신 것은,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람을 향한 리더십'이다.

과거 유라인, 강라인, 규라인 등 예능계의 거대 파벌들이 대부분 남성 방송인 중심으로 굳어져 있을 때, 송은이가 구축한 이른바 '송은이 사단(송라인)'은 소외당하던 여성 예능인들과 공개홀 코미디 무대에서 버티던 비주류 방송인들의 든든한 방파제가 됐다. 김숙을 비롯해 안영미, 신봉선, 김신영 등 당대 최고의 개그우먼들도 모두 송은이라는 거목의 자양분을 먹고 자랐다.

사실 그의 탁월한 리더십과 내공은 예전부터 증명돼 왔다. 지상파에서 순수 여성 예능이 전멸해가던 2007년, 송은이는 케이블 예능의 전설적 마스터피스인 '무한걸스'를 굳건히 이끌며 최강자의 저력을 과시했었다. 2010년 '청춘불패'의 구원투수로 긴급 투입, 난잡하던 프로그램을 단 한 회 만에 안정시킨 포스도 우리는 기억한다.

여기에 평균 나이 40대 개그우먼들의 피, 땀, 눈물로 가요계와 예능계를 뒤흔든 걸그룹 셀럽파이브의 파격적인 성공 역시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주장인 송은이를 필토로 김신영, 신봉선, 안영미가 뭉쳐 맨발로 칼군무를 추던 그 무모한 도전. 일회성 웃음을 넘어 대중에게 짜릿한 전율과 해방감을 선사했다. 셀럽파이브는 아이돌 중심의 시장에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연대의 메시지를 증명하고, 결국 제1회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여자예능인상까지 거머쥐었다.

'MBC 연예대상' 방송화면 캡처
'MBC 연예대상' 방송화면 캡처

이처럼 송은이가 깔아놓은 판 위에서 후배들은 비로소 홀로 서는 법을 배웠고, 자기가 가장 잘하는 분야를 찾아내, 영광스러운 정점에 서고 있다. "선배님이 불러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며 수상 소감에서 눈물을 흘린 안영미, "선배님으로 오래 보고 싶어 독립했다"는 김신영의 고백. 이는 송은이의 리더십이 비즈니스를 넘어선 '진정성'이었음을 증명한다.

유튜브 채널 '비보티비' 캡처
유튜브 채널 '비보티비' 캡처

회사 운영 방식만 들여다봐도, 이 진정성은 결코 헛말이 아니다. "휴가 갈 때 환전해서 외화 봉투를 쥐여주고, 10년 근속 연예인에게 포상 휴가와 휴가비를 지원한다"는 복지 철학은 '식구'로 대하는 송은이식 리더십의 단면이다. 동시에 "먹성 좋은 사람이 끝도 없이 먹으면 안 되니 식대는 1만5000원으로 제한한다"며 유쾌하면서도 철저한 현실 경영 감각을 발휘하는 모습 또한, 송은이가 왜 이 거친 정글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성공한 CEO인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특별한 점은 소속 아티스트 '숫자'가 아니라 그 '스펙트럼'에 있다는 점이다. 미디어랩 시소에는 현재 조혜련, 안영미, 신봉선부터 배우 봉태규, 전미도, 옥자연, 임형준은 물론,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1600만 관객을 모은 장항준 감독, '시그널'과 '킹덤'을 쓴 김은희 작가, 브로드웨이 토니상 6개 부문을 석권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박천휴 작가, 그리고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까지 모여 있다.

코미디언 출신 기획사가 영화, 드라마, 뮤지컬, 범죄 콘텐츠 전문가를 한 지붕 아래 모은 셈이다. 권일용이 송은이를 두고 "미래를 본 대표님"이라 부른 것도 과장이 아니다.

최근에는 장항준 감독과 함께 영화 '오픈 더 도어' 제작에도 도전했다. 이처럼 송은이는 엔터업계에서 방송인이자, 여성 CEO가 스스로 영토를 개척하는 법에 대한 가장 완벽한 답안지를 써가는 중이다.

올리브 새 예능 프로그램 '극한식탁'의 제작발표회가 27일 서울 상암동 스탠포드호텔에서 열렸다. '극한식탁'은 제한시간 안에 아내 취향 저격 요리를 완성 해야 하는 남편들의 예측불가 요리쇼. 29일 목요일 저녁 8시 50분 첫 방송된다. 포토타임을 갖는 송은이의 모습. 상암동=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2019.08.27/
올리브 새 예능 프로그램 '극한식탁'의 제작발표회가 27일 서울 상암동 스탠포드호텔에서 열렸다. '극한식탁'은 제한시간 안에 아내 취향 저격 요리를 완성 해야 하는 남편들의 예측불가 요리쇼. 29일 목요일 저녁 8시 50분 첫 방송된다. 포토타임을 갖는 송은이의 모습. 상암동=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2019.08.27/

백수에서 100억 CEO까지. 그 까마득한 간극을 채운 건 결국 사람이었다. 송은이는 한 번도 자신의 성공을 혼자만의 것이라 말한 적이 없다. "직원들이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해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겸손은 그래서 더 묵직하게 들린다.

과거 지상파에서 여성 예능이 전멸해가던 위기 속에서도 케이블과 뉴미디어를 장악하며 끝내 살아남은 송은이. 여성 예능인이라는 한계를 유리천장 삼아 갇히는 대신, 자신만의 견고한 성을 직접 지어 올린 그의 '비보(VIVO, 살아있는)' 정신은 앞으로도 한국 예능 시장을 환하게 비추는 가장 견고하고 따뜻한 등대가 될 전망이다.

정빛 기자 rightlight@sportschosun.com

영문 기사 보기 (View English Article)

Copyright (c) 스포츠조선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