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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라면 피하고 싶지는 않다. 선수 시절 쌓아놓은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겠다."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현역 시절 1990년 이탈리아 대회를 필두로 4회 연속 월드컵 무대에 섰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가 피날레였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은 두 번째 도전이었다. 희비의 쌍곡선을 그렸다. 기대가 실망으로, 다시 희망으로 바뀌었다. 금메달 외에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병역 혜택이 걸린 금메달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신적 부담은 발을 무겁게 했다. 결승 진출 문턱인 4강전에서 아랍에미리트를 만나 연장 혈투를 치렀지만 끝내 좌초했다. 0대1로 무릎을 꿇었다.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반전은 또 있었다. 이란과의 3~4위전은 그의 시계를 다시 돌렸다. 1-3으로 뒤진 후반 33분 각본없는 드라마가 연출됐다. 와일드카드(23세 초과 선수)박주영(아스널)이 골문을 열었다. 이어 지동원(선덜랜드)이 후반 43분과 44분 릴레이 포를 작렬시키며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뒀다. 11분간의 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홍 감독은 헌신을 다한 박주영과 뜨겁게 포옹했다. "대회 전에는 금메달이 아니면 의미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15~16년 동안 축구를 했지만 후배들이 나에게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무엇인가를 깨우쳐 줬다. 축구를 떠나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홍명보호의 주소였고, 박주영의 감격이었다. 모두가 2012년 런던올림픽을 기약했다. 사나이들의 약속이었다.
7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은 순탄치 않았다. A대표팀과의 중복 차출로 마음고생을 했다. 올림픽 예선의 경우 A매치와 달리 선수 소집 의무 규정이 없다. 유럽파는 논외였다. J-리거도 읍소를 해야 가능했다. 어떻게 변할 지 몰라 베스트 11이 없었다. 무명의 선수들로 팀을 꾸렸다. 미소는 잃지 않았다. "우리 팀은 스토리가 있다"는 말로 위안을 삼았다.
용병술은 특별했다. "난 너희들을 위해 항상 등 뒤에 칼을 꽂고 다닌다. 너희들도 팀을 위해 등 뒤에 칼을 하나씩 가지고 다녀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감독이 책임진다는 메시지였다. 선수들을 향해 오로지 목표를 향해서 뛰어가라는 명령이었다. 홍명보호는 생존했다. 조 1위로 런던올림픽 티켓을 거머쥐었다.
"군대를 안 가면 내가 대신 가겠다"는 말로 박주영의 병역 연기 논란을 잠재웠다. 홍정호(제주) 장현수(FC도쿄) 한국영(쇼난 벨마레)이 부상으로 잇따라 낙마했다. 시련은 있었지만 쉼표는 없었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 꿈에 그리던 런던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사상 세 번째로 8강 진출에 성공한 홍명보호는 런던에서 한국 축구의 역사를 바꿨다. 축구종가 영국을 격침시키고 사상 첫 올림픽 4강 신화를 이룩했다. 일본과의 3~4위전에서 2대0으로 승리하며 올림픽 사상 첫 동메달을 선물했다.
이제 더 큰 짐이 드리워졌다. 월드컵이다. 홍 감독은 갈림길에서 A대표팀 감독을 수락했다. 그는 런던올림픽 황금 세대를 탄생시켰다. 유일한 연결고리다. 브라질월드컵은 새로운 도전이다. 월드컵대표팀 감독 홍명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