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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샷!] 한국사회 떠도는 '유령 아이들'

기사입력 2025-07-19 08:49

[영화 '아무도 모른다'.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국행정연구원 연구보고서 캡처. DB 및 재판매 금지]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저는 어려서부터 천식이랑 피부병으로 아팠는데, 병원에 갈 때마다 제 신분증이 없어서 부모님이 곤란해하십니다." (12세 A양)

"태권도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단증을 딸 수 없습니다. 주민등록번호나 외국인등록번호가 없어 제가 저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5세 B군)

'그림자 아이들'이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출생등록이 되지 않아 사회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의료기관에서 태어난 아동의 정보를 지방자치단체에 자동으로 전달하도록 하는 출생통보제가 19일 시행 1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인 수천명이 있다. 부모의 체류 자격이나 법적 지위로 출생등록이 어려운 미등록 이주아동과 외국인 아동들이다.

한국사회에 존재하지만 이름도, 생일도, 부모도 법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유령 아동'이다.

◇ 미등록 외국인 아동 4천여명…제도 바깥에 놓여

출생통보제는 태어난 아동의 존재를 공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 제도다. 그러나 가족관계등록법상 출생신고 대상은 '국민'으로 돼 있어 외국인 아동은 해당하지 않는다.

감사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출생 미등록 외국인 아동은 4천25명으로, 전체 출생 미등록 아동의 65%를 차지했다. 의료기관이 아닌 곳에서 태어난 아동을 합칠 경우 그 규모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출생 신고를 하지 않는 대표적 사유로는 부모의 체류자격이 박탈되거나 만료된 경우, 한국인 배우자와 이혼한 뒤 체류자격 없이 자녀를 출산한 경우, 난민 인정·신청자 또는 인도적 체류 허가자 지위인 경우, 국내에 본국 재외공관에 없는 경우, 문화·종교적 요인으로 인해 본국에 혼외 출산을 밝히기 어려운 경우 등이 있다.

지난해 9월 부산 한 병원에서는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1.2㎏ 미숙아가 버려진 일이 발생했는데, 이 아이를 낳은 여성은 미등록(불법체류) 신분으로 "병원비를 벌어오겠다"며 병원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미등록 외국인 아동들은 의료·교육·체류 등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국제아동권리 비정부기구(NGO) 세이브더칠드런이 전한 사례로는 보험가입이 안돼 병원을 갈 수 없는 아이, 코로나19 당시 QR코드를 생성할 수 없어 식당조차 갈 수 없었던 아이, 학교 진학이 어려운 아이 등이 있었다.

설사 학교장 재량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더라도 친구들과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다.

중학생인 C양은 "친구들과 떡볶이나 마라탕을 먹으러 갔다가도 계산할 때가 되면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다"며 "친구들은 부모님 카드로 계산하거나 휴대전화로 돈을 보내는데 저는 카드도, 휴대전화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A양, B군, C양의 이야기는 세이브더칠드런이 아동 신원 보호를 위해 일부 각색한, 실제 국내에 거주하는 출생 미등록 외국인 아동들의 사연이다.

◇ 신분 없는 아이들, 범죄·학대 노출 위험 커

이러한 '그림자 아이들'의 문제는 '차이나타운', '브로커', '아무도 모른다', '가버나움' 등 그간 많은 영화에서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는 아이는 공식적으로 '없는 아이'이기에 보건과 교육 등 모든 정책에서 제외된다. 신원 확인을 할 수 없어 제도적 보호망 밖에 놓인다. 범죄와 학대에 노출될 위험성이 클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다.

한때 내국인 중에서도 '그림자 아이'가 큰 문제가 됐다. 기존에는 아이를 출산하더라도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국가가 그 존재를 알기 어려워 '유령 아동' 발생을 예방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202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을 계기로 출생통보제가 도입돼 제도적 보완이 이뤄졌다.

문제는 출생통보제가 대한민국 국적 아동만을 대상으로 한 점이다. 출생등록이 되지 않은 미등록 이주아동과 외국인 아동은 한국 땅에서 유령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주여성 및 아동을 지원하는 바라카 작은도서관의 김기학 대표는 "2018년 예멘 난민이 한국에 왔을 당시 아이를 낳더라도 국내에 예멘 대사관이 없어 영사 업무가 불가능했다"며 "말소된 여권을 살리기 위해 일본·중국에 있는 예멘 대사관에 보내더라도 수개월이 걸리고, 해당 언어를 번역·공증하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미등록 아동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남아 혹은 불교권 국가에서 온 여성이 혼외 출산한 경우 종교적·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출생 등록을 어려워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김 대표는 "이렇게 등록 안 된 아이들은 인신매매·장기매매에 활용되거나 유기·학대 등을 당하기 쉽다"며 "하다못해 사람이 키우는 반려견도 나라에 등록을 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에 대해 한국이 인정해주는 절차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출생등록과 국적획득은 달라…유엔 "아동은 출생 즉시 등록돼야"

국내 체류 외국인 수가 빠르게 증가하는 만큼 인구 관리, 관련 정책 운용을 위해 보편적 출생등록제가 시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보편적 출생등록제는 부모의 법적 지위, 출신국가와 상관없이 그 나라에서 태어난 모든 아동의 출생 사실이 공적으로 등록되는 제도다.

속지주의(출생지주의)를 택한 미국과 캐나다는 자국 내에서 태어난 모든 아동에 대해 출생 등록을 허용하고 있으며, 한국과 같이 속인주의(혈통주의)를 택한 프랑스, 독일, 일본도 국적 보유 여부와 관계없이 출생신고를 허용하고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7조에 따르면 아동은 출생 후 즉시 등록돼야 한다. 한국은 1991년 이 협약을 비준해 관련 국제 기준을 따를 의무가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지난 17일 보편적 출생등록제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출생등록의 부재는 단순한 행정 문제를 넘어 아동의 생존·보호·교육·건강 등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강조했다.

사단법인 온율 전민경 변호사는 "출생등록이 곧 국적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은 명백히 다르다"며 "국내 이주민 인구가 늘어나고 한국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국민인 것은 아닌 만큼 보편적 출생등록을 위한 입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도 출생 등록될 권리를 인간으로서 갖는 기본적인 권리로 봤다.

이은애 전 헌법재판관은 2023년 3월 기혼 여성과 불륜관계로 아이를 낳은 생부가 출생신고를 못 하도록 한 현행법에 대해 위헌 판단을 내리면서 보충의견으로 "누구든지 자신이 출생한 지역의 관할 국가에 의해 출생 사실이 공적으로 기록되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의 발급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권리는 '국민의 권리'가 아닌 '인간의 권리'"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동의 국적이나 체류자격에 따라 그 보장의 필요성이 달라진다고 볼 수 없다"며 "외국 입법례를 보더라도 자국의 신분등록제도를 국민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고 밝혔다.

지난달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번 새 정부 인권과제 중 하나로 '모든 아동의 출생 등록될 권리 보장 제도 마련'을 제안했다.

인권위 관계자는 "아동은 사회의 한 개인으로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되어져야 한다는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라 외국인아동을 포함한 모든 아동에 대해 보편적 출생등록제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winkite@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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