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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인적십자회 간호원 양성학교의 교수로 활동하며, 구호와 양성, 연대의 네트워크를 통해 독립운동의 저변을 넓혔다. 같은 해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기독교청년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곽병규 선생은 중앙청년회와 연합을 추진하고, 해외 연합조직과 협력을 모색하며 국경을 넘어선 청년 연대를 실천했다.
1921년 2월에는 대한인적십자회 대표위원으로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 일대의 회원·자금 모집을 책임졌다. 그해 3월 1일 겉으로는 잔치를 베풀고 안으로는 비밀리에 제3회 3·1만세운동 기념식을 가졌다. 폭력 대신 연대, 선동 대신 돌봄으로 이어진 그의 방식은 지속 가능한 항일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이후 1922년 소련 시베리아조선인교육회 부회장에 선출되며 교육 운동을 이어갔고, 국내 귀환 후에는 1928년 신간회 사리원지회 설립 당시 부지회장을 맡아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오가며 민족 역량을 결집했다.
같은 해 10월 경산병원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청년동맹 관련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체포와 탄압은 그의 뜻을 꺾지 못했고, 의사·교사·청년 지도자라는 다중의 역할은 끝내 독립운동의 연속선으로 남았다.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려 2011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그의 조명은 훈장 하나의 서사를 넘어, 돌봄과 배움이 곧 애국이었던 고귀한 지도자 곽병규 선생의 삶의 방식을 기억하는 일이다.
이천영 광주 고려인마을 이사장은 "곽병규 선생의 이야기는 총과 폭력만이 아닌 의료·교육·청년 연대로 이어진 항일의 역사"라며 "디아스포라의 현장에서 묵묵히 이어진 실천이 오늘의 우리에게 연대의 책임과 시민적 용기를 묻고 있다"고 밝혔다.
phyeonsoo@yna.co.kr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