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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랑(23·고양시청)은 전주교육대 부설초 1학년 시절 친오빠(김명홍씨)를 따라 스케이트화를 신었다. 고향에선 꽤나 유명했다.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망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넓은 무대로 나오자 다소 기가 꺾였다. 서울 목일중으로 전학온 뒤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림자 신세였다. 다시 전주로 내려온 김아랑은 실망하지 않았다. 남다른 성실함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자신의 뒷바라지를 위해 1톤 트럭으로 전국을 다니며 창틀 설치 작업을 하던 아버지(김학만씨)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태해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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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된 김아랑의 첫 올림픽은 환희와 좌절이 공존했다. 올림픽 한 달 전 아킬레스건과 인대를 다쳐 빠른 스타트가 어려운 상황에서 주 종목인 1500m 결선 당일 급성 위염으로 앓아 누웠다.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 간단한 식사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컨디션이 엉망인 상태에서 치른 경기는 실격이었다. 500m와 1000m에서도 실패를 맛본 김아랑은 노메달에 그칠 위기에 내몰렸다. 그러나 그녀를 위로해준 건 3000m 계주였다. 가장 영광스런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환한 웃음이 러시아 소치의 아이스링크장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 김학만씨(55)에게 김아랑은 '효녀'다. "상냥하고 웃음이 많은 데다 효녀다. 외국에 나갈 때는 통신료를 아끼기 위해 로밍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속이 깊다." 딸 자랑에 아버지는 팔불출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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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울지 않았다. 오히려 트레이드 마크인 '살인 미소'를 날렸다. 그러면서 "저는 4위도 만족해요"라며 명언을 남겼다.
드디어 3000m 금메달. 동생들을 이끌고 함께 오른 시상식대 맨 꼭대기이기에 더욱 빛난 메달이다. 강릉=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