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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시작은 '친구 따라'였다. 축구부 친구와 친해지면서 얼떨결에 축구화를 신었다. 발은 빨랐지만, 왜소했다. 가능성은 충만했지만 시련도 많았다. 문래중 진학후 첫 슬럼프를 경험했다. 아들의 축구를 열렬히 후원하던 아버지가 병마로 누우셨다. 어머니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 키는 크지 않고 축구는 늘지 않았다. "굉장히 힘든 시기였다. 키도 안크고, 집안은 어렵고, 아버지는 편찮으시고, 축구는 안늘고, 자신감도 없고…." 총체적 위기였다. 축구부 탈퇴를 선언했지만 축구의 운명은 거스를 수 없었다. 감독이 다시 박용지를 불렀다. 못이긴 척 다시 축구화를 신었다. 이후 박용지는 단 한번도 멈춰서지 않았다. 유난히 키가 작은 아들을 염려한 아버지는 성치않은 몸으로 매일 새벽 신선한 '초유'를 구해 날랐다. "아버지는 의지가 강하신 분이었다. 보통 우유의 몇십 배나 영양이 많다며, 늘 얼린 초유를 챙겨주셨다." 중학교 졸업 무렵 1m64였던 키는 고등학교 졸업 때 1m80대로 훌쩍 자랐다. "키가 크면서 내 축구 스타일이 돌아왔다. 자신감도 함께 올라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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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지는 전국대회 4강권을 꾸준히 유지하던 '축구명가' 김포 통진고의 에이스였다. 고교리그 득점왕도 수상했다. 중앙대 시절인 2011년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우즈벡과의 평가전을 앞두고 정우영이 부상했다. 대체선수로 홍 감독은 당시 U-리그 득점 1위 공격수 박용지를 깜짝 발탁했다. 박용지는 "감기기운이 있어 약을 먹고 곯아 떨어졌는데, 일어나보니 전화와 축하문자가 수십통 와있더라. 믿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감독님께서 첫 경기부터 기회를 주셨고, 골도 넣었다. 꿈만 같았다." 첫 출전한 우즈벡전에서 데뷔골을 쏘아올리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런던올림픽까지는 인연이 없었다. "쉽지 않다고는 생각했다. 자신감이 부족했다. 아쉬운 기회를 놓쳤다. 선배들 틈바구니에서 위축돼 내 것을 못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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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박용지는 김호곤 전 울산 감독의 선택을 받았다. 프로 첫해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대구와의 홈 개막전, 후반 교체투입돼 역전승을 이끌었다. 16경기에서 1골1도움을 기록하며, 리그에 적응해가던 7월 울산미포조선과 연습경기중 발가락 피로골절로 쓰러졌다. "기회를 잡았을 때 부상이 왔다. 막 자리를 잡고 올라설 단계였는데…." 축구인생에서 처음으로 5개월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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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밌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
피말리는 강등권 혈투중인 부산의 최전방에서 담담하게 '미래와 희망'을 노래했다. "이 고비만 잘 넘긴다면, 내년에는 충분히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다. 부산은 가능성이 무한한 팀"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울산에 이어 부산에서도 소녀팬 부대를 몰고 다니는 '꽃미남' 박용지에게 "이미 스타 아니냐"고 하자 손사래를 쳤다. "진짜 열심히 해서 스타가 돼야죠. '내일은 진짜 스타'죠."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