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민은 멜로가 잘 어울리는 배우다. 부드러운 눈빛과 매력적인 미소로 수많은 작품에서 뭇 여심을 녹였다. 남궁민도 "10년간 짝사랑 전문 배우였다"며 "멜로 장르가 익숙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로맨틱한 얼굴에서 따뜻한 온기를 걷어내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SBS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남궁민은 선량한 얼굴 안에 살기를 담아낸 사이코패스 연기로 시청자들을 소름돋게 했다. 그야말로 '대반전'이었다.
"남궁민이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 몰랐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기분이 좋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원래 이 정도는 했는데 왜 몰라줬던 걸까 하고 괜한 심통도 나던걸요." 장난스러운 농담으로 드라마 종영 소감을 전하며 웃음 짓던 남궁민이 진짜 속내를 들려준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들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더군요. 함께 연기한 배우들 덕분에 시청자들이 이번 드라마를 많이 봐주셨어요. 덕분에 저도 인지도를 좀 얻었죠. 지금의 인기가 오래가진 않을 거예요. 다만 다음 작품에서 조금 더 탄력을 받을 순 있겠죠.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냄새를 보는 소녀'는 제목 그대로 냄새를 눈으로 보는 여자와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미스터리와 멜로가 결합된 독특한 이야기를 선보여 사랑받았다. 남궁민은 인기 셰프라는 탈을 쓴 연쇄살인마 권재희 역을 맡아 극의 무게중심을 잡았다. 그는 "박유천과 신세경의 조합도 좋았고, 살인마라는 캐릭터가 신선해서 택한 작품인데 결과가 좋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궁민의 연기가 없었다면 이 드라마는 단순한 멜로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남궁민의 사이코패스 연기가 선사한 숨막히는 긴장감이 이 드라마를 끝까지 시청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이번 드라마에선 최대한 힘을 빼고 연기했어요. 일부러 무서워 보이려고 하면 나중에 진짜 임팩트를 줘야 할 때 그 느낌이 반감될 것 같았거든요. 권재희는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 표정도 절제되게 표현했어요. 그 안에 약간의 강조점을 둬서 무서운 느낌을 차근차근 쌓아갔죠.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니 엄청 거창해 보이네요. 하하하."
다른 배우들과 달리 혼자 등장하는 장면이 많아서 조금은 외로웠던 촬영장이었다. 남궁민은 "동료배우들과 친해질 기회가 적어서 아직 전화번호도 모르는 게 아쉽다"고 울상 짓더니 "그런데 나 혼자 연기하니까 스케줄 잡기도 편하고 촬영도 일찍 끝나는 장점이 있더라"고 센스 있게 덧붙였다.
2002년 시트콤 '대박가족'으로 데뷔해 벌써 13년차. 이젠 실력으로 인정받는 배우지만 그는 아직 목마르다. 배우로서 정점에 오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연기에 스스로 만족할 때, 그리고 남궁민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대표작이 단박에 떠오를 때, 그때가 내 정점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더 활발히 활동해야 할 때죠"
군제대 이후 얻은 깨달음은 그가 연기 활동에 욕심내는 또 다른 이유다. 복귀작이었던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로 크게 호평받았으나 마음의 부담감 때문에 차기작을 정하지 못하고 한동안 활동을 쉬었던 것이 그의 마음가짐을 달라지게 했다. "당시 저는 연기하는 사람은 예능에 출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지식했어요. 톱스타도 아니면서 말이죠.(웃음)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거품이 가라앉더군요. 사람에겐 순리란 게 있다는 것, 그리고 내게 주어진 기회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를 좀 더 내려놓는 시간이 됐죠."
그 후로 남궁민은 쉬지 않고 연기했다. '실업급여 로맨스', '구암 허준', '로맨스가 필요해3', '마이 시크릿 호텔', '달래 된, 장국' 등 여러 작품이 최근 몇년간 그의 필모그래피에 추가됐다. 그의 로맨틱한 이미지에 기댄 캐릭터들이 많은 편이었다. 아쉬움은 없냐고 물으니 "사람들이 많이 안 봐서 아마도 캐릭터의 유사점을 눈치채지 못 했을 것"이라는 유쾌한 답이 돌아왔다.
입담도 좋고 유머러스한 남궁민이지만 실제 생활은 심심한 편이라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TV 보고 밤에 지인들과 가벼운 술자리를 갖는 게 전부란다.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워낙 사랑꾼의 면모를 보였지만 실제 연애에선 무뚝뚝하고 애정 표현도 낯 간지러워 잘 못한다. 연예인 중에 친한 이들도 손에 꼽는다. "저는 연기가 하고 싶어서 배우가 된 거라 그런지 연예인의 끼가 강한 사람들과는 잘 안 맞더라고요. 사실 저는 연기를 하는 직장인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해요."
연기하는 직장인으로서 연기에 대한 고민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진다. 그런데 그 고민을 연기로 풀 수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니 그는 천상 배우 맞다. "어떤 연기가 좋은 연기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까요. 하지만 요즘 연기를 하면서 예술에 근접해가는 느낌을 받고 있어서 너무 좋아요. 그 어떤 순간에 느껴지는 진솔함을 가장 소소한 방식으로 뽑아내는 게 가장 좋은 연기라고 생각해요. 조금 식상하더라도 저는 그런 배우로 남고 싶어요."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