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인들은 잔디를 밟으면 흥분하기 마련이지."(최순호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그라운드를 잠시 떠난 축구인들이 필드에서 모였다. 승점이 걸린 경기가 아닌데도 저절로 샘솟는 승부욕. "축구인들을 위한 화합의 자리"라며 여유롭게 웃다가도 티샷 순간엔 무섭게 집중한다. 결정적 찬스를 낚아챈 스트라이커의 날카로운 슈팅을 꼭 닮은 샷이다. 축구인들이 골프에도 남다른 감각을 발휘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5월의 따사로운 봄 햇살과 청량한 바람이 축구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축구화와 축구공 대신 골프화와 골프채를 들고 필드로 나선 축구인들의 골프,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울리 슈틸리케 A대표팀 감독은 오랜만에 골프 클럽을 잡았다. 올해 마수걸이 필드 나들이다. 다리 부상으로 약간 불편한 몸이지만 "축구가 아니니 괜찮다"며 유쾌하게 드라이버를 잡았다. 슈틸리케 감독은 은퇴 후 곧바로 골프를 시작했다. 구력이 꽤 길다.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잘칠때는 88타까지 쳐봤다고 자랑이다. 하지만 이날은 샷이 마음대로 가지 않았다. 90타에 그쳤다. 아쉽지 않냐고 묻자 "연습을 안 하고서 좋은 성과를 바라는 건 잘못된 일"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선수들을 대하듯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한 원칙주의자의 모습, 그대로다.
차범근 2017년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은 이날도 18홀 내내 카트를 타지 않았다. "운동을 하러 왔으니 운동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설명이 돌아온다. 차 부위원장의 골프실력은 정평이 나있다. 첫 출전이지만 내친 김에 우승까지 노렸다. 초대 우승자가 최용수 감독이란 사실을 전해주자 "나도 할 수 있겠는데"라며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지난해 신태용 감독이 축구인 골프대회에서 우승한 후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냈다는 얘기에 "리우올림픽을 위해 신 감독에게 일부러 져줘야겠다"며 어른다운 양보심을 드러내며 흐뭇하게 웃는다. 이날 차 부위원장은 평소 실력 발휘를 하지는 못했다. 숨은 이유가 있었다. 전날 '과도했던' 집안일 때문이었다. 차 부위원장은 "아내에게 '이번 대회에서 부진하면 전부 당신 책임'이라고 했는데도 안봐주더라"며 살짝 화살을 돌렸다.
'독수리'와 '황새'의 만남도 성사됐다. 최용수 서울 감독과 황선홍 전 포항 감독이 같은 조에서 축구 아닌 골프로 맞섰다. 두 사람은 서로 달랐던 경기 스타일처럼 이날의 경기 운영도 달랐다. 완벽주의자 황 감독은 미리 예습을 하고 왔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미리 개인 라운드를 하면서 몸을 풀었다"고 귀띔 했다. 반면 최용수 감독은 "승부의 세계가 지겹지 않냐"며 짐짓 여유로운 모습. K리그 클래식 1등팀의 여유였다. 하지만 첫 홀부터 두차례의 OB가 이어지자 같은 조의 동료들은 "어제(8일) 대패의 후유증"이라며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서울은 포항에 1대3으로 패했다. 최 감독은 90타, 황 감독은 78타를 쳤다. 황 감독의 완승이었다.
필드에서는 그라운드에서 하기 힘든 이야기도 한결 편하게 꺼내놓을 수 있다. 국제대회를 앞둔 대표팀 감독은 골프를 매개삼아 K리그 감독과 구단 관계자들과 심도있는 논의도 했다. 신태용 감독은 K리그 감독들에게 선수 차출에 대한 협조를 부탁했다. 올림픽 준비 상황도 서로 논의한다. 신 감독은 "이미 밑그림은 다 그렸다"며 "와일드카드 포함 두세 자리를 고민 중이다. 깜짝 발탁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 감독은 이날 차 부위원장 등과 한조에 속해 막내역할까지 하느라 두배로 바빴다. 축구 이야기 사절을 선언한 인사도 있었다. 최강희 전북 감독이었다. 최 감독은 "여기까지 와서 축구 얘기를 하느냐. 오늘은 축구 말고 농구 얘기하자"며 좌중에 웃음을 던졌다.
이날 골프대회는 축구인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70세가 된 백발의 축구인들, 30대 젊은 지도자들도 이날만큼은 선, 후배, 동기들과 어린아이처럼 농을 던지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한국축구 발전을 위한 제언과 격려가 오갔다. 벌써부터 내년도 대회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아름다운 석양과 함께 2016년 축구인의 잔치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용인=김표향, 박찬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