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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이스하키를 바꾼 정몽원 회장의 '8년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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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박찬준 기자]한국 아이스하키는 '정몽원 시대' 전과 후로 나뉜다.

2013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수장에 오른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66)은 불모지였던 한국 아이스하키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환희와 눈물의 연속이었던 8년, 정 회장이 마침내 도전의 마침표를 찍었다. 정 회장은 28일 서울 강남 슈피겐홀에서 아이스하키협회장 퇴임식을 가졌다. 이번 퇴임식은 코로나19로 인해 23대 협회 임원 등 관계자 35명만이 참석, 간소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비대면 영상을 통해 많은 하키인들이 함께하며, 정 회장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정 회장은 퇴임사에서 "어려움에 처한 대한민국 아이스하키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주위 분들의 말씀에 용기를 내서 무거운 소명을 받아들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길을 차근차근 헤쳐나간 끝에 여기까지 이르렀다"며 "지난 8년은 도전으로 점철된 나날이었다. 고개 하나를 힘겹게 넘으면, 더 큰 산이 버티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어려운만큼 보람도 뒤따랐다"고 했다.

정 회장의 설명대로였다. 정 회장 취임 전까지 한국 아이스하키의 현실은 처참했다. 남자 대표팀 랭킹은 28위, 여자는 26위에 불과했다. 아시아에서도 변방이었던 한국 아이스하키를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한 아이스하키 전문 기자는 "캐나가가 올림픽에서 한국과 맞붙으면 162대0으로 이길 것"이라고 조롱할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홈에서 펼쳐지는 평창올림픽에도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12년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은 "한국 아이스하키가 올림픽에 나서기 위해서는 남자 랭깅 18위, 여자 16위 안에 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사실상 불가능한 미션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 앉을 수는 없었다. 정 회장이 팔을 걷어붙였다.

정 회장의 하키사랑은 유명하다. 정 회장은 1994년 현재의 안양 한라 아이스하키단을 창단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속 부도의 위기에도 아이스하키단을 지켜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정 회장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한라의 경기를 빼놓지 않고 지켜보고, 선수들과 직접 스킨십을 나눴다. 깐깐하고 세심한 경영으로 유명한 정 회장이지만, 아이스하키 앞에서는 어린아이로 바뀐다. 오죽하면 한라그룹의 차세대 주력인 자율주행, 그중 순찰 로봇의 이름이 아이스하키의 골키퍼를 의미하는 '골리'일 정도다. 한라그룹이 아이스하키에 투입한 비용은 1000억원을 훌쩍 넘는다. 정 회장이 사재를 털어넣은 것도 적지 않다.

정 회장은 '평창올림픽 출전'이라는 목표를 세운 뒤, 한국 아이스하키를 빠르게 바꿨다. 올림픽 유망주들을 길러내기 위해 선수들을 핀란드 2부리그로 파견하기도 했고, 상무 아이스하키단을 아시아리그에 편입시켰다. 안양 한라를 중심으로 한국에 적응한 외국인 선수들을 귀화시키는 작업도 진행했다. 무엇보다 미국에 있던 NHL 출신의 백지선 감독을 영입하며, 대표팀의 경쟁력을 한단계 끌어올렸다.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선수로 뛰었던 백 감독은 그간 한국 아이스하키에서 볼 수 없는 섬세한 훈련 프로그램으로 선수들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2016년 34년만에 일본을 격파하고, 동계아시안게임 사상 첫 은메달 획득 등 상승곡선을 그리던 남자 아이스하키의 하이라이트는 '키예프의 기적'이었다. IIHF 디비전1 그룹B(3부리그)에 불과했던 남자 대표팀은 2017년 4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디비전1 그룹A(2부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월드챔피언십(1부리그) 진출에 성공했다. 3부리그에 있던 팀이 단 2년만에 월드챔피언십에 오른 것은 100년 가까운 아이스하기 역사를 따져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톱디비전을 경험한 나라는 전 세계에 19개에 불과하다. 정 회장은 준우승을 차지한 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여자 아이스하키 역시 새러 머리 감독 선임 후 비약적 발전을 이어갔다. 올림픽 당시 남녀 모두 16위까지 끌어올리며 경쟁력을 과시한 한국 아이스하키는 평창올림픽에서도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쳤다. 선수들의 물을 직접 따라주는 등 낮은 리더십을 보여준 정 회장의 헌신 덕분이었다. 한라그룹 창업자이자 선친인 고 정인영 회장이 늘 강조하던 '꿈을 꾸고, 꿈을 믿고, 그 꿈을 실현하라'(Dream it, believe it, and just do it.)를 실천한 정 회장은 취임 당시 모토였던 '빙판의 새 지평(New Horizon on Ice)'을 이뤄냈다. 정 회장은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아시아인으로는 다섯번째로 IIHF 아이스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정 회장은 떠나는 순간까지 한국 아이스하키를 걱정하고, 응원했다. 그는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저의 존재가 많은 결실을 맺게 하는 밀알 한 톨과 같았으면 한다"며 "회장직에서 물러나지만 아이스하키와 맺은 아름다운 인연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한번 아이스하키인은 영원한 아이스하키인'이 나의 지론이다. 앞으로도 한국 아이스하키의 끊임없는 진전을 지켜보고 응원하며,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힘을 보태겠다"고 했다. 정 회장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아는 하키인들은 뜨거운 박수로 그를 보냈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