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 마니아·가족 여행객 모두의 사랑받는 인기 코스
(서울=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강원도 옛 탄광지역 여행은 묘한 울림을 안긴다.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의 온기, 연탄으로 밥을 짓고 방안을 데우던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이곳 여행은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니다.
기성세대에게는 잊은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청년들에게는 힘겹게 살아온 부모 세대의 모습을 만나게 해준다.
떠나온 시간에 대해 감사함과 미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 석탄의 길에서 치유의 길로… 운탄고도 걷기길
강원도 탄광지역의 해발 약 1천m 능선 위에는 '운탄고도'라 불리는 길이 있다.
본래 석탄을 실어 나르던 산업로였으나, 지금은 화물차 대신 걷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 길의 고동을 잇고 있다.
운탄고도의 역사는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백선 철도가 정선 신동읍까지 연결됐고,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한 길이 필요해졌다.
2천여 명의 국토건설단이 삽과 곡괭이로 길을 개척해 두메산골에 처음으로 '길다운 길'이 놓였다.
이어 석탄광업소가 들어서고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태백시도 원래 삼척 소속이었으나, 석탄 산업 규모가 커지자 별도 시로 분리됐다.
1970년대, 석탄산업의 중심지였던 정선의 고한 시장에는 200개가 넘는 점포가 들어섰고 영화관과 슈퍼마켓까지 들어설 만큼 번성했다. 그러나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로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이 길 역시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갔다.
2000년대 초, 하이원리조트 개발로 이 일대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묻혀 있던 고산지대의 옛길은 '하늘길'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고, 이후 정선·영월·삼척·태백 등 폐광지역 4개 시군을 잇는 총연장 173.2㎞의 '운탄고도 1330'으로 정비됐다.
이름 속 숫자 1330은 만항재의 해발 고도를 뜻한다.
그중 하이원리조트와 맞닿은 5㎞ 구간은 길이 넓고 경사가 완만해 누구나 걷기 좋은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하이원에서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면 바로 만날 수 있어 가족 단위 여행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구간에서도 옛 탄광의 흔적을 접할 수 있다. 이름만으로도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1177 갱도'가 대표적이다. 이는 ㈜동원탄좌 사북 광업소가 개발한 최초의 갱도로, 운탄고도의 산업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 깊은 산속 옹달샘…도롱이연못
운탄고도를 걷다 보면 이 길의 상징적 장소로 꼽히는 '도롱이연못'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탄광 갱도가 무너지며 생겨난 작은 물웅덩이다.
광부의 아내들은 이곳에서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빌었고, 연못 속 도롱뇽이 살아 있는 한 남편도 안전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몇 해 만에 다시 찾은 운탄고도의 숲속, 이른 아침 풀잎 위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막 떠오른 햇살이 연못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드리웠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풍경을 담고 싶어 드론을 띄우자, 하늘 위를 선회하던 솔개 한 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혹 드론을 공격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조종기를 잡은 채 내려다본 도롱이연못은, 마치 밀림 속 감춰진 보물 같았다.
짙푸른 숲 한가운데 고요히 숨은 연못, 검푸른 수면과 하얗게 말라 죽은 나무가 선명한 대조를 이뤘고, 물결 사이로 거꾸로 비친 하늘이 잔잔히 일렁였다. 자연이 숨겨둔 비밀을 살짝 들춰본 듯한 순간이었다.
연못 입구에는 이름처럼 작은 옹달샘이 있었다.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어 목을 축이는 이가 보여 다가가니, 운탄고도를 달리던 트레일 러너였다. 요즘 인기라는 트레일 러닝을 이 깊은 산속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 아침, 첨단 기계와 자연, 움직임과 정적, 땀방울과 이슬, 인간과 숲이 한순간 교차했다.
이제 운탄고도는 더 이상 석탄을 나르는 길이 아니다. 산업의 무게를 감당했던 옛길은 걷는 이들의 일상과 사색을 담아내는 고원 트레일로 변모했다. 도롱이연못과 화절령 같은 지점들은 단순한 경유지가 아니라, 기억과 이야기가 머무는 장소가 됐다. 길은 시대에 따라 형태를 바꿨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철길 위의 시간 여행… 하이원추추파크
운탄고도는 태백의 작은 마을 '통리'(通里)까지 이어졌다. 통리라는 지명은 사실 여행을 많이 다닌 이들에게조차 낯설다.
운탄고도 길목에 자리 잡은 이곳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길이 통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지만, 한때는 연탄을 실어 나르던 탄광 지대로 향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통리를 기점으로 펼쳐지는 철길 풍경은 우리나라 철도사에서도 손꼽히는 명물이다. 하늘에서 보면 완벽한 원을 그리는 원형 철로, 그리고 흥전역과 도계역 사이의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 위해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Z'자 스위치백 구간이 그 주인공이다.
터널을 뚫을 기술이 없던 시절, 기차는 이렇게 고개를 넘었다. 특히 해발 245m의 도계역에서 680m 높이의 통리역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표고차가 커, 스위치백이 탄생한 배경이 됐다.
이제 그 옛날의 풍경은 관광 자원으로 새롭게 살아났다. 삼척 '하이원추추파크'는 오봉산 중턱 흥전사 옛터 인근에 자리하며, 스위치백 구간을 달리는 기차가 고전적인 객차와 함께 영화 속 장면 같은 낭만을 선사한다.
추추스테이션에서 흥전삭도마을까지 왕복 16.8km, 약 100분 동안 이어지는 여정에서 기차는 Z자형 철로에서 멈췄다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고개를 오른다.
옛 증기기관차의 모습을 재현한 객차는 총 3량으로, 고풍스러운 조명과 인테리어의 칸, 동화 속 방처럼 꾸민 칸 등 각기 다른 매력을 지녔다.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추억이 되고, 어른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여행의 마무리는 트레인파크 내 식당에서 주인장이 직접 만든 함박스테이크로 풍성하게 채울 수 있다. 가족 단위 여행객을 위한 레일바이크, 키즈카페, 실내 동물원 등도 마련돼 있다.
기차 객실을 개조한 독특한 숙박시설과 북유럽의 작은 마을을 연상케 하는 독채 객실, 그리고 고원지대 특유의 상쾌한 공기를 만끽할 수 있는 글램핑 시설 등은 이곳을 좀 더 깊이 여행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 다시 살아난 그 시절의 추억
추추트레인이 멈춰 서는 흥전역과 삭도마을은 탄광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산업 유산이다.
기차는 30분간 정차해 여행객들이 마을을 둘러볼 수 있도록 한다. 언덕 위에는 석탄을 실어 나르던 삭도가, 아래에는 광부 가족이 머물던 사택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옛 시간의 숨결을 전한다.
마을회관에 들르면 주민들이 직접 만든 추추찹쌀도넛, 전병, 채소전 등 향토 먹거리를 맛볼 수 있다. 삼척시는 이 산업 유산을 관광 자원으로 되살리기 위해 벽화길과 트릭아트 포토존 등 다양한 볼거리를 마련했다.
이강희 하이원추추파크 영업마케팅 팀장의 안내로 발길을 조금 더 옮겨 도계로 향했다.
길목마다 옛 관사들이 눈에 띄고, 올해 6월을 마지막으로 폐광된 도계광업소가 탄광촌의 역사를 증언한다. 한때 '개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번성했던 마을은 이제 옛 명성을 잃었지만, '구공탄 마을'이라는 간판과 관사 건물에서 당시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이강희 팀장은 "도계에서는 여전히 연탄 난방을 하는 집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면서 "낡은 기와지붕 위로 올라온 플라스틱 형태의 굴뚝은 연탄으로 난방하는 세대"라고 말했다. 한때 4만 명에 달하던 도계 인구는 지금 1만 명으로 줄었지만, 마을 골목마다 스민 그리운 옛 풍경과 새로운 이야기들이 함께 숨 쉬고 있다.
◇ information
폐광지역의 재도약을 위한 노력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제1회 운탄고도 트레킹 페스티벌' 국제대회가 오는 10월 말 강원랜드 주최로 열린다.
해발 1천340m 하이원탑에서 출발해 가족들이 광부의 안전을 빌던 도롱이연못까지 걷는 '소원의 길'을 내·외국인이 함께 순례하는 행사다.
1일 차에는 하이원탑에서 도롱이연못까지 이어지는 '소원의 길' 지정 기념으로 종교단체 초청 순례행사가 진행되며, 2일 차에는 운탄고도 일대 주요 명소를 배경으로 한 스토리텔링, 탄광 유물 전시 등 다양한 콘텐츠가 마련된다.
또 11월에는 정선에서 하이원리조트와 함께하는 산업유산 체험 여행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준비돼 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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