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애니메이션 천하 일본에서 실사 영화의 저력을 보인 이상일(51) 감독이 영화에 대한 진심을 전했다.
일본 영화 '국보'를 연출한 이상일 감독이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배급사 NEW에서 스포츠조선과 만나 '국보'의 연출 과정부터 재일 한국인 감독으로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국보'는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가부키 배우가 재능을 꽃피워 인간 국보로 선정될 때까지의 반생을 그린 이 영화는 예술에 인생을 바친 남자의 외로움과 집념, 그리고 예술이 인간 존재를 어떻게 고양하는지 깊이 있게 다뤘고 무엇보다 일본의 전통 연극 가부키 공연 장면을 아름답게 표현한 마스터 피스로 호평을 얻었다.
중국의 전통극 경극을 소재로 한 첸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93)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장르인 '국보'는 일본판 '패왕별희'로 불리며 일본에서 최장 흥행 중이며 영화 '훌라 걸스'(06) '악인'(10) '용서받지 못한 자'(13) '분노'(16)를 통해 연출력을 인정받은 재일 한국인 이상일 감독의 신작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국보'는 지난 6월 6일 일본에서 개봉해 102일 만에 누적 관객 수 1000만명을 돌파, 흥행 수익 164억엔(약 1544억원)을 달성했고 이달 10일까지 158일간 1207만명을 돌파, 흥행 수익 170억엔(약 1608억원)이라는 경이로운 숫자를 기록하며 메가 히트했다. 이는 일본 실사 영화 역사상 두 번째 1000만 영화이자, 1260만 관객을 동원해 흥행 수익 173.5억엔(약 1638억원)을 기록한 '춤추는 대수사선2: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03, 이하 '춤추는 대수사선2', 모토히로 가츠유키 감독)에 이어 역대 실사 영화 흥행 2위라는 전례 없는 성과로 일본 영화계 기록을 새롭게 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국보'는 차주 '춤추는 대수사선2'를 꺾고 일본 역대 실사 영화 흥행 1위 기록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 더구나 이 기록은 재일 한국인 이상일 감독의 연출작이라는 점에서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더한다.
이상일 감독은 국내 개봉을 앞두고 내한, 이날 오전 봉준호 감독과 대담 영상 촬영차 만남을 가져 관심을 끌었다. 이 감독은 "봉 감독이 내게 '고생이 많았죠?'라며 웃더라. 가부키를 소재로 한 영화가 일본에서도 많지 않고 연극 무대극을 영화로 만들어 냈다는 지점에서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고 위로해줬다. 또 3시간짜리 영화를 만들면서 겪은 그 고통을 잘 안다며 다독여주기도 했다. 물론 일본에서 흥행도 축하를 받았다. 농담으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을 이겼다고 하기도 했다. 나 역시 내 영화로 처음 1000만 관객을 동원했기 때문에 앞으로 들어올 질문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고 웃었다.
그는 일본에서 실사 영화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의미에 대해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큰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흥행 수익도 무려 200억엔이 넘는 경우도 많다. 실사 영화가 일본에서 1000만 영화가 되는 것은 거의 20년 만이다.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한동안 사람들이 영화관을 가지 않았는데 이후 다시 관객을 극장으로 돌아오게 한 것도 애니메이션의 힘이었다. 그런 지점에서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업적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실사 영화는 배우가 연기를 한다 .배우를 통해서 관객이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을 보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영화를 1000만명의 관객이 봐준 것에 대해 스스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국보' 이후 일본 영화계 변화에 대해서는 "사실 어려운 질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일본 영화계는 2~3년 전부터 다양성 영화가 많이 생겨났다. 애니메이션도 그렇지만 실사도 여러 장르 영화가 들어오고 있다. '국보'도 이렇게 성공하리라곤 아무도 생각 못했다. 오히려 흥행 조건이 어려운 작품이었다. 그런데 제작사를 비롯해 영화를 만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관객들은 다양한 것을 좋아한다는 가능성을 '국보'를 통해 발견한 것 같다"며 "솔직히 소설이 나온 직후 '국보'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지만 투자가 어려웠다. 영화에 대한 투자 심리도 떨어졌던 시기였고 그래서 다시 투자 관심도가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국보'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회사에서 투자를 받았는데 따졌을 때 애니메이션의 힘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한국 영화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최근 국내 극장은 한국 영화가 부침을 겪으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급부상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이 감독은 "좀 슬프기도 하다. 내가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가 20대였는데 그 당시엔 한국 영화 폼이 많이 올라오는, 즉 기운이 세게 올라오는 시기였다. 그래서 일본에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한국 영화 감독에 대해 부럽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이창동 감동 등 일본 영화 감독이 한국 영화 감독에게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감독들이 나오는 시기였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안타깝다. 한국 영화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영화계가 어려운 것 같다. 오름세가 있으면 내림세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시 올라오는 느낌도 있다. 지금 한국은 OTT 콘텐츠가 화려하지 않나? 한동안 영화에 쏠렸던 힘이 OTT로 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생기는 힘이 다시 영화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한·일 합작 프로젝트에 대한 계획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제안이 많이 없다. 최근에 본 한국 영화가 '승부'였다. 이병헌이나 송강호도 기회가 있다면 꼭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 한국 OTT를 보면 수위가 정말 세더라. 대부분 복수나 조폭 이야기가 많이 다뤄지는데 내가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아름다움을 다루는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일본 관객이 '국보'에 대해 열광한 이유도 이 감독은 "'국보'를 본 관객 특징은 첫 주 보다 2주 차가 더 좋았고 2주 차 보다 3주 차가 더 좋았다. 그리고 5주 차에 제대로 흥행이 터진 케이스다. 특이한 사례다. 개봉 초기에는 예상대로 중장년층 관객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2주 차부터 가부키에 대한 관심이 먼 젊은 관객이 보면서 관심을 받게 됐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평가도 좋았고 영화 자체에 호평도 많아졌다. 대부분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에도 시간이 순삭됐고 새로운 체험을 느꼈다는 반응이었다. 가부키가 이렇게 재미있고 알기 쉬운 문화임을 '국보'를 통해 알게 됐다는 관객도 많았다. 노년층인 90대까지도 평소에 영화관을 안 가는데 입소문이 퍼지면서 영화관에 오게 됐다. '이게 우리의 문화구나'라며 재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됐고 그 덕에 흥행할 수 있었다. 확실히 '국보'는 관객 흡입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며 "누군가는 '일본판 패왕별희'라고도 하는데 실제로 영화를 만들 때 의식을 하진 않았다. 물론 학창시절 '패왕별희'를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그 작품에 대해 아주 크게 남아 있다. 그렇지만 가부키를 소재로 '온나가타(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 배우)'를 만들었을 때는 어떤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영감을 받은 대목도 있겠지만 '국보'를 처음부터 '패왕별희'로 만들겠다 염두하진 않았다"고 고백했다.
'국보'는 요시자와 료, 요코하마 류세이, 타카하타 미츠키, 테라지마 시노부, 모리 나나, 쿠로카와 소야, 와타나베 켄 등이 출연했고 '훌라 걸스' '악인' '용서받지 못한 자'의 이상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지난 6월 6일 일본에서 개봉한 '국보'는 오는 19일 국내 개봉한다.
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