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대구 시민체육관에서 삼성과 두산이 격돌하는 2013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가 열렸다. 미디어데이에는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삼성의 류중일 감독과 배영수, 최형우,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친 두산 김진욱 감독, 유희관, 홍성흔 등이 참석해 공식기자회견과 포토타임을 가졌다. 미디어데이가 끝난 후 두산 유희관(왼쪽)과 삼성 류중일 감독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대구= 김경민 기자 kyungmin@sportschosun.com / 2013.10.23.
"선후배 안가리고 던질겁니다. 그게 제 생존 무기니까요."
구속은 프로야구 투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다. '얼마나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느냐'로 투수들의 수준이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올해 포스트시즌에서 두산의 '슈퍼 히어로'로 떠오른 좌완투수 유희관은 이런 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최고구속이 135㎞ 밖에 안되는 상대적으로 느린 공을 가지고서도 넥센과 LG의 강타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구속'보다는 '제구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면서 플레이오프 MVP로 뽑혔다.
그런 유희관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는 '봉인'해 뒀던 유희관의 히든 카드. 바로 80㎞가 채 안나오는 '초저속 커브'다. 현재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오직 유희관만이 던질 수 있는 구종이다. 언뜻 보기에는 마치 장난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유희관의 '초저속 커브'에는 그만의 생존 철학이 담겨있다. 140㎞를 못 넘기는 투수로서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뺐기 위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유희관은 "초저속 커브는 내가 프로야구 투수로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유희관이 드디어 '초저속 커브'의 봉인을 풀었다. 한국시리즈에서 "선후배 안가리고 던질 것"이라면서 삼성 타자들을 슬슬 도발했다. 유희관은 23일 대구 시민체육관에서 열린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에서 "이번 한국시리즈에서는 초저속 커브를 구사하겠다"고 밝혔다.
유희관만이 던질 수 있는 '초저속 커브'는 양날의 검이다. 구속이 극단적으로 느리기 때문에 배팅 타이밍을 잡기가 무척 힘들다. 특히 130㎞대의 직구와 섞어서 던지면 상대 타자들은 큰 혼란에 빠진다. 구속차가 50㎞이상 나기 때문에 130㎞대의 공도 마치 150㎞ 이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유희관이 '초저속 커브'를 구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미리 대비한다면 이런 공만큼 치기 쉬운 것도 없다. 변화 궤적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 타자들의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으로 올라서 있다. 특히 한국시리즈의 맞상대인 삼성은 최초로 정규시즌 3연패를 한 팀이다. 이승엽 최형우 박석민 채태인 등 한국을 대표하는 일류 거포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자칫 홈런으로 연결되기 쉽다. 게다가 구속이 매우 느리기 때문에 주자가 있을 경우 도루를 허용하기도 쉽다.
이런 단점 때문에 '초저속 커브'는 자주 구사할 수 없다.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순간에만 써야 한다. 유희관이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이 공을 안 던진 이유다. 사실 '안' 던진게 아니라 '못' 던졌다. 유희관은 "LG와의 플레이오프 때 던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 타자에게 안타를 만는 바람에 결국 못던졌다"고 털어놨다. 주자가 나가면서 초저속 커브를 던질 기회를 놓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희관은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때는 적극적으로 '초저속 커브'를 던지겠다고 강조했다. 최종 우승을 가리는 시리즈인 만큼 자신이 갖고 있는 무기를 모두 사용하겠다는 각오다. 특히 유희관은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던지겠다"고 했다. 이 말 속에는 과거의 사연이 하나 담겨 있다. 초저속 커브로 얽힌 유희관과 삼성 타자, 특히 최고참 진갑용과의 해프닝이다.
지난 7월 6일 잠실경기 때였다. 당시 두산 선발로 나선 유희관은 4-1로 앞선 7회초 2사에서 대타로 나온 진갑용을 상대로 79㎞짜리 '초저속 커브'를 던졌다. 판정은 볼. 그런데 타석에 있던 진갑용이 매우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유희관을 계속 노려봤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진갑용으로서는 유희관이 상대를 도발하기 위해 일부러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유희관은 "절대 그런 의도는 없었다"며 대선배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양 팀 사령탑 역시 "이전에도 유희관은 초저속 커브를 가끔 던졌다. 상대를 자극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본다"고 판단했다. 당시의 해프닝은 이렇게 무리없이 해결됐다.
하지만 이렇듯 유쾌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 유희관으로서는 삼성전에 '초저속 커브'를 들고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이미 '초저속 커브'없이도 뛰어난 경기를 펼친 바 있다. 그럼에도 미디어데이에서 "기회가 되면 누구에게든 던지겠다"고 한 것은 그만큼 승리에 대한 열망이 크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유희관은 인터뷰 말미에 "오해없이 봐주셨으면 좋겠다"며 삼성의 선배 타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과연 어떤 삼성 타자가 유희관의 '초저속 커브'를 만나게 될 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