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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스포츠조선 김진회 기자] '파란만장'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에이스'라 생각해본 적 없던 '악바리'
윤석민은 스스로 "운이 좋았던 선수"라고 자평했다. "2005년 KIA에 입단했는데 팀이 최하위(당시 8개 팀 중 8위)에 머물렀다. 당시 육성 개념이 없었지만, 팀이 꼴등을 하면서 운 좋게 출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고교에서 이름을 날렸던 선수가 아님에도 졸업 이후 곧바로 프로에서 풀타임을 소화한다는 자체가 큰 도움이 됐다. 그 때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 2007년 선발로 전환된 첫 해, 7승18패 평균자책점 3.78을 기록했다. "당시 18패를 기록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유는 스물 둘 나이로 프로야구 한 팀에서 선발로 뛸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이었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야구가 정말 재미있던 시기였다. 그 때에는 졌지만 언론과 팬들이 박수를 쳐줬다." 2008년, 첫 전성기를 맞았다. 14승5패, 무엇보다 평균자책점 1위(2.33)를 찍었다. 윤석민은 "승운이 잘 따랐다. 2007년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타자들이 지원을 잘해줘 나도 공격적으로 피칭을 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에이스'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2011년, 정점을 찍었다. 17승5패 평균자책점 2.45. 당시 투수 4관왕(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승률)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 부문 4관왕은 KBO 역사상 선동열 전 감독과 윤석민 뿐이다. 하지만 윤석민의 생각과 현실에는 괴리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동료들과 코칭스태프에서 '네가 에이스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에이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이스는 항상 잘해야 하는 선수인데 나는 그저 목마른 것이었다.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상황이라 매 시즌 간절하게 시즌을 준비했고. 대충한 적이 없었다. '에이스'라는 수식어가 다소 스트레스로 다가왔었다"고 밝혔다. 헌데 그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게 도움을 준 이가 가수 임재범이었다. 윤석민은 "간절함이 강해도 좋지 않더라. 위기에 몰렸을 때 공에 대한 자신감보다 타자들이 속아주길 바랐다. 그래서 유인구 활용이 늘었다. 그 때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다 느낀 바가 있었다. 임재범씨가 노래를 부르는데 풍기는 모습이 '에이스' 같더라. 잘하든 못하든 기죽지 않고 어깨를 딱 펴고 노래를 부르시더라. 퍼포먼스 자체가 에이스더라. 남들은 에이스라고 하지만 내가 너무 위축돼 있었다는 걸 느꼈다. 이후 변화구 사용을 줄이고 직구 위주로 타자를 상대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 엄청난 자신감을 얻었던 시즌이었다"며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윤석민은 2014년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당시 볼티모어와 3년 최대 1300만달러짜리 계약을 했다. 그러나 1년 만에 한국으로 유턴한 사연은 기구했다. "당시 계약(2월 중순)도 늦었고, 훈련을 혼자하다 보니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캐치볼 상대도 없었다. 캠프 선수들에 비해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스프링캠프 때는 잘 던졌지만, 몸을 더 만들고 오라는 감독의 주문에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 그 때부터 안좋은 상황이 겹쳤다. 비자를 받으러 캐나다에 갔는데 여권을 잃어버려 간신히 공항에서 찾았는데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돼 하루동안 갇혀있었다. 이후 마이너리그 경기를 앞두고 집도 구하지 못했다. 미국에 처음가면 에이전트가 월세 500~600만원짜리 아파트를 추천해 준다. 나는 굳이 그렇게 하기 싫어 통역과 이야기해 다른 집을 예약했었는데 커뮤니케이션 실수로 집을 구하지 못했다. 훈련이 끝나면 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모텔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첫 번째 등판을 날렸다. 3이닝 10실점했다. 또 등판날 비가 이틀 연속 내려서 등판이 취소되고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상황은 더 꼬여만 갔다. 윤석민은 "시즌 초에 몸이 안 되고 운동을 못하다보니 훈련 스케줄을 못 따라갔다. 내 잘못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마이너로 내려왔고,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해 플로리다(루키·재활 캠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헌데 미국 사회에선 부정적인 시선이 가득했다. '다른 선수들도 똑같은 여건'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할 수 없이 경기를 뛰었는데 구속은 안나오고 공은 세게 던져야 해서 어깨 부상이 커졌던 것 같다." 이후 상황은 더 답답하게 흘렀다. "'내 몸이 망가지겠다'고 생각이 돼 8월 즈음 구단에 몸이 안 좋다고 말을 했다. 그런데 병원검진에서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그래도 몸상태를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경기보다는 웨이트 훈련을 많이했다. 마지막 9월 확장 로스터를 노렸다. 구단과도 선발보다는 중간계투로 나서기로 이야기를 마쳤다. 이후 피칭도 많이 하면서 어느 정도 몸 상태가 됐는데 두 차례 실전에서 결과가 좋지 않았다. 이후 40인 로스터에서 제외됐다."
40인 로스터 제외는 윤석민에게 '독'이 됐다. "40인 로스터에서 빠지면 내 계약서는 마이너리그로 넘어온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2~3년차 때 사용할 수 있던 마이너 거부권은 메이저리그에 등록되지 않으면 효력을 발생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2년째부터 잘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스프링캠프에 초청되지 않았다. 캠프가 시작되기 한 달 전에 들어가 개인훈련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구단에서도 40인 로스터에 나를 포함시키면 거부권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아예 캠프에서 배제시켰다."
윤석민은 한국행에도 애를 먹었다. 그는 "단장을 찾아가서 '남은 계약에 대한 돈(약 40억원)은 안받겠다. 방출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 때 단장이 '땡큐 윤'이라고 한 마디 하더라. 구단에서도 원하고 있었다는걸 눈치챘다. 그런데 절차를 진행하다가 MLB 선수협 노조의 반발에 부딪혔다.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다며 선수협에서 나를 못자르게 하더라. 당시가 2월 중순이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돌아가서 합류해야 한다고 선수협에 의지를 표명했는데 구단과 옥신각신하더라. 결국 또 혼자 훈련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절차가 엄청 늦어지더라.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실 미국에서 1년을 버린 셈이나 마찬가지다. 후회 하지 않았지만 운도 안좋았고 몸도 안좋았다. 인생에서 많은 경험을 했었다"고 고백했다.
▶2008년부터 아픈 어깨와 '악플' 그리고 '팬'
윤석민의 어깨가 처음 아팠던 건 2008년이었다. 진통주사를 맞으며 아픈 어깨를 부여잡고 10년을 더 버텼다. 2018년에는 어깨 통증을 코칭스태프에 숨기면서까지 이를 악 물었다. 그러나 2019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스프링캠프에서 국내 복귀가 결정된 비행기 안에서 은퇴를 결심했다. "귀국한 뒤 1~2년 더 재활할 자신이 없더라. 재활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입지도 줄어들대로 줄어들었다. 진심으로 정정당당하게 경쟁해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프니깐 많은 생각이 들더라. 그 때부터 앞만보다가 뒤를 보기 시작했다. 은퇴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되고. 현실적으로 몸 상태도 생각했다."
2015년부터 악플은 윤석민을 괴롭혔다. 이에 대해 윤석민은 팬 비난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냈다. "나에 대한 좋은 글은 없다. 그래도 마음으로 좋은 글을 써주는 이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야구를 하면서 1도 부끄러움 없이 행동했다. 내가 팬의 입장이라도 당연히 나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야구인생에서 고마운 사람을 말해달라고 하자 '팬'을 꼽았다. 그러면서 자신을 자책했다. 그는 "사실 어렸을 때는 야구선수는 연예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야구선수는 운동만 잘하는 것이 팬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팬들에게 살갑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교육도 부족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팬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게 됐다. '팬분들이 없었다면 내가 없었겠구나'하고 많이 공감했다. 특히 끝까지 아파서 경기도 못 뛰는 상황에서도 격려까지 해주시는 팬들이 계셨다. 그래서 내게 고마운 사람은 부모님, 동료, 지도자분들에서 1번이 '팬'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윤석민은 다음달 18일 '윤석민 special thanks to'라는 이름으로 팬사인회 및 저녁식사 겸 기부행사를 연다. 모두 구단과 상관 없이 윤석민이 개인적으로 기획해 마련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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