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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발레 중흥의 중심에 댜길레프가 있었다.
그는 천재도, 지식인도, 이론가도 아니었다. 창조적 재능 따위는 없었다.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지도 못했다. 오히려 속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다. 흠결 많고, 부족한 그의 유일한 장점은 실용적이고 새로운 걸 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필요한 인재를 발굴해 불러들이고, 그들을 유능하게 육성해 과실을 따 먹는 것도 그의 주된 재능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는 고난 속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를 지녔다. 요즘으로 치면 그는 훌륭한 기획자이자 경영자였다. 한마디로 발레계의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발레는 마리우스 프티파가 확립한 고전 발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책에 나올 듯한 이국적인 배경과 러브스토리,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4막 구성, 꿈같은 환상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도입, 발끝으로 춤을 추는 여성 발레리나의 현란한 기교와 장엄한 서정성, 그리고 여성 발레리나를 보조하는 남성 발레리노가 함께 무대를 꾸미는 파드되(2인무) 등을 특징으로 했다. 그 영향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 프티파의 안무는 연말이면 이곳저곳에서 지금도 흔히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댜길레프는 프티파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예술잡지 '예술세계'를 발간하던 그는 음악·공연·문학의 총체 예술을 지향했던 바그너 오페라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체호프의 연극에서 볼 수 있는 미묘함, 연기의 디테일, 분위기로부터 발레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아울러 당대에 본적 없는 안무를 펼친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에게도 영향받았다. 맨발에 맨다리를 드러내고 코르셋 없이 얇은 튜닉만 걸친 채 홀로 춤을 추다가 갑자기 말없이 사색에 잠기곤 했던 덩컨의 모습은 그에게 충격을 던져줬다.
그는 새로운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1909년 발레단 '발레 뤼스'를 창단했다. 재능있는 안무가와 무용수를 발굴하면 발레단으로 속속 데려왔다. 안나 파블로바, 미하일 포킨, 타마라 카르사비나, 레오니드 마신, 그리고 그의 연인이자 전설이 된 무용가 바츨라프 니진스키 등이 발레단에 합류했다.
최근 출간된 '댜길레프의 제국'(에포크)은 댜길레프와 20세기 초반을 수놓은 무용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발레의 최전성기를 경험했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와 그들의 사랑과 열정, 그리고 꿈을 담았다. 영국의 저명한 무용평론가 루퍼트 크리스천손의 리듬감 있는 문체와 뛰어난 스토리텔링 방식, 무엇보다 발레에 대한 깊은 애정이 책 곳곳에 묻어난다. 댜길레프에 대한 평전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발레에 대한 입문서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쉽게 쓰였다. 책은 20세기 초반, 새로운 예술의 길을 개척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 전해주는 드라마적인 흥분과 함께 시대의 주름과 격동, 그리고 천재들의 갈등과 질투, 타락, 엉망진창이 된 삶을 그린다. 탁월한 논픽션은 어떤 경우 픽션보다 더 극적이고, 마음을 움직이며 심지어 강렬하기까지 한데, 이 책이 그렇다.
김한영 옮김. 460쪽.
buff27@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