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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가 예술의 정점이었던 시절…세계를 사로잡은 '발레 뤼스'

기사입력 2025-02-13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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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활약한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 조명한 책 '댜길레프의 제국'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19세기 말 러시아제국은 망해갔지만, 그 어느 때보다 예술계는 활황이었다. 불안과 공포는 예술가들에게 좋은 양식이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차이콥스키, 스트라빈스키, 칸딘스키, 스타니슬랍스키 등 예술계의 선후배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나갔다. 당대 문화를 이끌었던 프랑스와 영국 예술계는 후진국 러시아에서 발생한 '새로운 물결'에 흥분했다. 그리고 발레는 그 중심에 있었다.

발레는 늘 비주류 장르였다. 왕 앞에서 보여주는 궁중 예술의 한 갈래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르게이 댜길레프(1872∼1929)라는 탁월한 기획자를 비롯해 창조적 재능을 갖춘 안무가와 무용가의 잇따른 등장은 예술계의 판도 변화를 일으켰다. 한 시대를 평정한 이들 덕분에 발레는 20세기 초반, 신생 장르였던 영화와 함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맛봤다.

그런 발레 중흥의 중심에 댜길레프가 있었다.

그는 천재도, 지식인도, 이론가도 아니었다. 창조적 재능 따위는 없었다.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지도 못했다. 오히려 속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다. 흠결 많고, 부족한 그의 유일한 장점은 실용적이고 새로운 걸 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필요한 인재를 발굴해 불러들이고, 그들을 유능하게 육성해 과실을 따 먹는 것도 그의 주된 재능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는 고난 속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를 지녔다. 요즘으로 치면 그는 훌륭한 기획자이자 경영자였다. 한마디로 발레계의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발레는 마리우스 프티파가 확립한 고전 발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책에 나올 듯한 이국적인 배경과 러브스토리,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4막 구성, 꿈같은 환상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도입, 발끝으로 춤을 추는 여성 발레리나의 현란한 기교와 장엄한 서정성, 그리고 여성 발레리나를 보조하는 남성 발레리노가 함께 무대를 꾸미는 파드되(2인무) 등을 특징으로 했다. 그 영향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 프티파의 안무는 연말이면 이곳저곳에서 지금도 흔히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댜길레프는 프티파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예술잡지 '예술세계'를 발간하던 그는 음악·공연·문학의 총체 예술을 지향했던 바그너 오페라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체호프의 연극에서 볼 수 있는 미묘함, 연기의 디테일, 분위기로부터 발레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아울러 당대에 본적 없는 안무를 펼친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에게도 영향받았다. 맨발에 맨다리를 드러내고 코르셋 없이 얇은 튜닉만 걸친 채 홀로 춤을 추다가 갑자기 말없이 사색에 잠기곤 했던 덩컨의 모습은 그에게 충격을 던져줬다.

그는 새로운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1909년 발레단 '발레 뤼스'를 창단했다. 재능있는 안무가와 무용수를 발굴하면 발레단으로 속속 데려왔다. 안나 파블로바, 미하일 포킨, 타마라 카르사비나, 레오니드 마신, 그리고 그의 연인이자 전설이 된 무용가 바츨라프 니진스키 등이 발레단에 합류했다.

이들은 발레를 통해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에 도전했을 뿐 아니라 명백한 동성애적 하위문화를 조성해 새로운 형태의 관능성을 제시했다. 여성들은 코르셋을 버리고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올리고, 뛰어오르고, 달리면서 격정적인 감정을 표출했다. 몸은 테크닉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가 됐다. 발레 뤼스 집단의 혁신성에 소설가 프루스트, 조각가 로댕, 시인 예이츠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은 탄성을 터뜨렸고, 일부 관객들은 열광했다.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하고, 굳건한 마에스트로 피에르 몽퇴가 지휘하며 니진스키가 무대에 올랐던 '봄의 제전'을 비롯해 발레 뤼스가 만든 발레는 이전에 닿지 못했던 발레 예술의 지극한 경지에 도달했다. 그 예술은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불안의 징후를 포착했고, 이후 벌어질 현대적인 삶의 비극을 예견했다.

최근 출간된 '댜길레프의 제국'(에포크)은 댜길레프와 20세기 초반을 수놓은 무용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발레의 최전성기를 경험했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와 그들의 사랑과 열정, 그리고 꿈을 담았다. 영국의 저명한 무용평론가 루퍼트 크리스천손의 리듬감 있는 문체와 뛰어난 스토리텔링 방식, 무엇보다 발레에 대한 깊은 애정이 책 곳곳에 묻어난다. 댜길레프에 대한 평전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발레에 대한 입문서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쉽게 쓰였다. 책은 20세기 초반, 새로운 예술의 길을 개척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들이 전해주는 드라마적인 흥분과 함께 시대의 주름과 격동, 그리고 천재들의 갈등과 질투, 타락, 엉망진창이 된 삶을 그린다. 탁월한 논픽션은 어떤 경우 픽션보다 더 극적이고, 마음을 움직이며 심지어 강렬하기까지 한데, 이 책이 그렇다.

김한영 옮김. 460쪽.

buff27@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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