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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맨발'에 대해 시인 주용일은 이렇게 썼다.
코끼리가 얼마나 예민한 동물인지 알 수 없지만, 맨발로 흙 위에 선 느낌은 알고 싶었다.
◇ 맨발로 걷는다는 것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었다. 붉은빛이 역력한 이 흙을 적토(赤土)라 하지 않고 왜 황토(黃土)라 부르는지 생각하면서 흙 위에 천천히 발을 올려놓는다.
춘풍이라 하기엔 냉기가 남은 바람이 발등을 스치는 3월의 마지막 날 대전 계족산 황톳길이다.
막 깔아놓아 아직 다져지지 않은 황토 알갱이가 발가락 사이를 간질인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코끼리처럼 발밑의 생명을 감지할 순 없지만, 최소한 내 몸과 연결된 무구한 대지를 감각해 본다.
10분쯤 걷다 보니 발바닥은 차가움보다 훈훈함에 익숙해진다.
맨발로는 빨리 걸을 수 없다. 이제 발밑에 신경을 끄고 고개를 든다.
노란 개나리색의 은은함이며, 소나무 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며, 어딘지 모를 곳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까지. 걸음 속도가 느릴수록 오감은 더 많은 일을 한다.
◇ 닭발이냐 봉황이냐
계족산(423m)은 대전 북동쪽에 있다. 산의 능선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곧게 뻗어 마치 대전 동북방에 병풍을 둘러친 모습이다.
차가운 북풍과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는 더없이 고마운 역할을 해왔다.
계족(鷄足)은 말 그대로 닭의 발이다. 산의 모양이 닭발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혹자들은 닭발이라는 산 이름을 탐탁지 않게 여겨 '봉황산'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고려사'에 이미 '계족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닭발을 봉황으로 승격(?)시키기엔 무리인 듯하다.
하지만 이 산이 지역민들에게 주는 무궁한 가치를 생각하면 닭발이면 어떻고, 봉황이면 어떤가. 또 닭발이 봉황보다 못한 게 무엇인가.
◇ 최초의 맨발길
계족산 황톳길은 대전·충남 지역 소주 브랜드인 ㈜선양소주 조웅래 회장이 2006년 계족산 임도 14.5㎞에 황토를 깔아 만들었다.
당시로선 전국 최초의 '맨발길'이었다. 맨발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이후 맨발걷기길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맨발걷기는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그러나 황톳길은 한번 깔면 끝나는 게 아니다. 계족산의 경우 매년 2천t의 질 좋은 황토를 전북 김제·익산 쪽에서 가져와 깐다.
부드럽고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도 필요하다. 관리와 유지에 드는 돈이 매년 10억원에 달한다.
이날도 비교적 사람이 적은 평일을 이용해 곳곳에서 연두색 트럭이 황토 깔기 작업에 한창이다.
◇ 산성에 오르다
월요일인 데다 새벽엔 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했지만, 황톳길엔 꽤 많은 '맨발러'들이 아침부터 부지런히 걷고 있다.
아직 꽃다운 꽃은 개나리뿐이었지만, 구불구불 이어진 황톳길가엔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굳건한 변화의 의지를 푸릇푸릇해진 팔다리로 과시하는 뭇 나무들이 쉼 없이 말을 건다. 봄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고, 봄은 쟁취하는 거라고.
쉬엄쉬엄, 느긋느긋. 봄의 태양이 힘겹게 뿜어내는 한 줌 볕을 즐기며 한 시간 반쯤 걸었나 보다. 계족산성으로 올라가는 표지판이 나왔다.
산성은 서문터 길이 가깝지만, 보수공사로 폐쇄돼 20∼30분 더 걸리는 남문터 오름길로 가야 한다.
계족산에 황톳길만 있었다면 어딘지 살짝 아쉬웠을지 모르겠다. 계족산성이 있어 '걷기'에 '역사'가 더해졌으니 더 바랄 게 없다.
오르기 위해 다시 신발을 신었다.
◇ 견고함과 치열함
20분쯤 걸렸다. 꽤 가파르지만, 한겨울이 아니라면 등산화를 신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산 정상에 거의 다가섰다. 허리를 펴고 큰 숨을 몰아쉰다. 멀찌감치 남문터 성벽이 보이는 순간, 보물을 찾아낸 것처럼 쾌재를 불렀지만, 이내 심경은 복잡해진다.
'그 옛날 어떻게 쌓았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역하다 죽어갔을까.' 산 정상의 능선에 지어진 테뫼식 산성을 볼 때면 늘 드는 두 가지 생각이다.
삼국시대 백제의 도읍이 웅진(공주)이던 시절부터 교통과 군사 전략적 요충지였던 대전엔 60여개의 산성이 산재해 있다. 가히 '산성의 도시'라고 할 만하다.
그 대부분은 백제가 축조했지만, 계족산성은 신라가 쌓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전히 논란은 있지만, 성내에서 출토된 토기의 제작 시기로 추정해볼 때 6세기 후반 신라가 세우고, 이후 백제가 7세기 전반까지 점유했다는 것이 현재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산성은 전체 길이가 1천37m로 대전 지역 산성 중 가장 크다.
정상에는 서문터와 남문터, 건물터, 물을 보관하던 집수지, 횃불을 피우던 봉수대 등의 흔적도 있다.
복원한 것이지만 촘촘히 쌓아 올린 성벽을 올려다보면 그 견고함에 놀라고, 동시에 1천500년 전 그 견고함을 만들어 낸 치열함에 감탄한다.
◇ 존재의 이유
내려다본다. 대전 시가지가 한눈에 잡히고 대청호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호수 너머로 충북 보은과 옥천까지 보인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곳에 산성을 쌓은 이유, 이곳을 놓고 다툰 이유를 알게 된다.
계족산성에선 모든 게 보였다. 상상 속에서 대청호에 잠겨버린 땅도 보인다. 봉수대 옆 우뚝 선 느티나무 세 그루는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
14.5㎞나 되는 황톳길을 다 걸으면 5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저마다의 나이와 무릎 상태를 감안해 계족산성에 오른 것에 만족한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올라온 길을 내려갔다.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황톳길엔 벚꽃과 황매화가 만개하고 좀 더 지나면 맥문동과 나무수국도 꽃을 피울 것이다.
◇ information
▲ 황톳길 걷기가 아니라 정상인 계족산성까지 등산하는 게 목적이라면 황톳길 입구인 장동산림욕장이 아니라 산디마을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2.7㎞로 최단 코스다.
산디마을은 계족산 골짜기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로, 매년 음력 10월 3일에 가을걷이가 끝나면 산신제를 지내는 등 민속이 잘 보존된 마을이다.
황톳길 중간에서 산디마을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 황톳길 입구에는 메타세쿼이아를 볼 수 있는 장동산림욕장과 생태문화공원이 조성돼 있어 걷기 싫은 사람은 이곳에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