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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 5층 대회의실. 국내의 매체들이 모두 모였다. BBC, CNN, 알 자지라, 블룸버그, 로이터, AP 등 외신들도 있었다. 취재진의 규모와 관심도 면에서는 A대표팀 감독 선임 때와 맞먹었다. 오후 2시 취재진을 불러모은 주인공이 섰다. 이곳 저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짧게 자른 회색 머리의 건장한 청년은 푸른 색의 수원 유니폼 상의를 전달받았다. '정대세'가 찍혀 있었다. 북한 A대표팀의 스트라이커 정대세(29)는 어눌한 말투로 "수원에서 뛰게 되어 영광입니다"고 했다.
2005년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축구 때문이었다. 북한 대표팀이 2006년 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 올라갔다. 일본과 같은 조였다. 북한은 일본과의 2차례 맞대결에서 모두 완패했다.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직접 북한 축구 대표팀으로 나서 일본을 꺾고 싶었다. 2006년 도쿄에 위치한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정대세는 뛰어난 축구 실력을 인정받아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에 입단했다. 프로에서 실력을 키웠다. 첫 해인 2006년 22경기에 나와 3골을 넣었다. 2년차인 2007년에는 급성장했다. 그해 40경기에서 18골을 넣었다.
2007년 6월 정대세는 북한 인공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다. 2008년과 2009년 열린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예선과 최종예선에서는 한국과 한 조에 들었다. 2차례 한국도 방문했다. 2010년 6월 남아공월드컵에 나선 정대세는 가슴에 인공기를 달고 세계 최강 브라질과의 경기에 나섰다. 경기 전 북한의 국가가 울려펴질 때 정대세는 눈물을 흘렸다. 경기 후 정대세는 "자이니치로서 이 곳에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8억원 몸값 정대세, K-리그의 대세가 되려면
2010년 월드컵 이후 정대세는 독일로 갔다. 2부리그 보훔에서 그의 역량을 마음껏 보여주었다. 2010~2011시즌 26경기에서 10골을 넣었다. 2011~2012시즌 중반 독일 1부리그 FC쾰른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1부리그의 벽은 높았다. 5경기에 나서는데 그쳤다. 2012~2013시즌, 부진은 계속 됐다. 1시즌 내내 5경기만을 소화했다. 쾰른은 정대세를 전력외 선수로 분류했다. K-리그팀들이 정대세를 주목했다. 수원과 대전이 적극적이었다. 결국 수원이 정대세를 낚아챘다. 이적료 30만 유로(약 4억2000만원)를 주기로 합의했다. 정대세와는 연봉 4억원에 3년간 계약했다.
8억원 짜리 선수의 마케팅적인 가치는 대단했다. 이 날 뿐만 아니라 8일 정대세가 입국할 때부터 국내외의 관심을 끌었다. 전세계 언론에 등장한 정대세의 광고 홍보 효과는 몸값의 수십배에 달한다. 수원은 정대세에게 14번을 부여했다. 서정원 수원 감독이 현역 시절 달고 뛰던 번호다. 그만큼 기대가 크다.
이제 시작이다. 정대세가 K-리그에서 '대세'가 되려면 기량을 보여줘야 한다. 독일 쾰른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경기 감각도 떨어졌다. 내부 경쟁도 치열하다. 라돈치치를 비롯해 하태균과 조동건 등이 버티고 있다. 에벨톤 C를 대신해 브라질 출신인 핑팡도 들어왔다.
정대세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큰 꿈을 가지고 있다. 정대세는 "15골을 넣겠다. K-리그에서 우승이 목표다. 우승하려면 공격수가 15골은 넣어야 한다"고 했다. 무리한 도전일 수도 있다. 정대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남자라면 언제나 도전해야 한다. 수원에서의 삶은 내게 도전이다"고 했다.
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