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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릴듯 열리지 않았던, 여자월드컵 첫승, 16강의 문이 동시에 활짝 열렸다.
E조 4위 한국과 3위 스페인의 맞대결은 '벼랑끝 승부'였다. 1-2차전에서 나란히 1무1패(승점1)를 기록했다. 2연승인 브라질(승점 6점)이 E조에서 가장 먼저 16강행을 확정지은 가운데 브라질전을 앞둔 코스타리카(2무, 승점2), 한국, 스페인은 16강을 두고 '예측불허' 3파전을 벌였다. 한국은 무조건 이겨야 사는 게임이었다. 한국이 이기고, 코스타리카가 지거나 비길 경우 조 2위로 16강행, 지거나 비길 경우 16강 꿈이 사라지는 외나무 혈투에서 태극낭자들은 기적같은 투혼을 발휘했다.
그러나 2010년 변화의 조짐이 감지됐다. FIFA 17세 이하 여자월드컵 우승, 2010년 20세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3위는 희망이었다. 세계 무대에서 대한민국 축구소녀들의 힘을 뽐냈다. 지소연, 여민지라는 걸출한 스타도 탄생했다.
2010년의 '황금세대'들이 성인이 된 2012년 12월 윤덕여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 남자대표팀 수비라인을 지켰던 명수비수 출신의 윤 감독은 포항제철중 감독으로 일했고, 포항 스틸러스 수석코치, 남자연령별 대표팀, 전남드래곤즈 수석코치를 두루 역임했다. 여자대표팀을 맡은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따뜻한 카리스마'와 '아버지 리더십'을 지닌 윤 감독에게 여자축구 사령탑은 천직이었다. 이후 2년 반동안 캐나다여자월드컵을 목표로 선수들과 동고동락해왔다. 2000년대 들어 최장수 여자대표팀 감독이다. 월드컵 첫승, 목표 하나로 아시안컵, 인천아시안게임, 키프러스컵, 동아시아대회에 잇달아 나서며 선수들과 끈끈한 신뢰를 쌓았다.
윤 감독은 WK리그의 중심, 1988년생 에이스들을 팀의 중심으로 믿고 썼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희생과 헌신으로 팀을 이끄는 '캡틴' 조소현을 비롯, 권하늘, 전가을, 유영아, 김도연을 중용했다. '박은선-지소연-여민지'의 공격라인은 역대 최강 전력으로 손꼽혔다. 20세 이하 3위 멤버인 '90라인(지소연 임선주 김혜리 강유미)' 17세 이하 우승 멤버인 '93라인(여민지 신담영 이소담 이금민)'이 든든히 뒤를 받쳤다. 17세 이하 월드컵 우승, 20세 이하 월드컵 3위를 경험한 선수들은 큰 무대에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무관심속에 "우리가 더 잘해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지난 5월 18일 월드컵 출정식, 태극낭자들은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전가을은 "대한민국에서 여자축구 선수로 사는 일이 외로웠던 것같다"며 눈물을 쏟았다. 준비과정속에 이영주, 여민지, 신담영 등 아끼던 동료들을 부상으로 떠나보내는 아픔도 경험했다.
2015년 6월, 패기만만하게 도전했지만, 막상 맞닥뜨린 월드컵 무대는 만만치 않았다. 캐나다여자월드컵 E조 조별리그 1차전, 브라질전에서 0대2로 완패했다. '지메시' 지소연은 "전반 27분에야 볼터치를 했다"며 자책했다. 라인을 너무 내려섰다고 했다. 코스타리카전 필승을 다짐했다. 분위기도 좋았다. 선제골을 내줬지만 2골을 따라붙었다. 지소연이 페널티킥 동점골, 전가을이 역전골까지 터뜨렸지만, 마지막 1분을 지키지 못했다. 후반 44분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했다. 수비에 더 집중했어야 했다고 했다. 다잡은 첫승을 놓치고 태극낭자들은 낙담했다. "첫승이 정말 어렵네요." 조소현, 심서연은 믹스트존에서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마지막 스페인전은 이겨야 사는 게임이었다. 비기거나 지면 바로 짐을 싸야 했다. 벼랑끝까지 몰린 그녀들은 독해졌다. 스페인전 전반, 완전하게 코너로 몰렸다. 변변한 공격 한번 하지 못한 채 캡틴 베로티카 보테케에게 선제골을 내줬다. 그러나 그렇게 물러설 순 없었다. 0-1로 몰리던, 후반 대반전이 일어났다. 후반 8분 캡틴 조소현이 강유미의 크로스를 헤딩 동점골로 연결했다. 후반 33분 윙백 김수연의 날선 '슈터링'은 골망에 그대로 날아들어 꽂혔다. 지소연은 "그 골이 들어가는 순간, 이건 이길 수밖에 없는 경기라는 느낌이 왔다"고 했다.
코스타리카전 무승부의 학습효과는 컸다.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기로, 두번의 실수는 절대로 하지 않기로, 끝까지 몸이 부서져라 지키기로 약속했다. 후반 인저리타임, 소니아 베르뮤데스의 마지막 프리킥이 날아들 때 선수들은 어깨를 나란히 겯고 딱 붙어섰다. 눈을 부릅뜬 채 피하지 않았다. 서로를 향해 외쳤다. "절대 움직이지마! 분명히 못넣는다." 베르뮤데스의 슈팅이 크로스바 중앙을 강타하고, 휘슬이 울렸다. "됐다! 이제 됐다." 벤치의 태극낭자들이 그라운드로 쏟아져나왔다.
태극낭자들이 월드컵 두번째 도전, 12년만에 짜릿한 첫승의 역사를 썼다. 2003년 미국여자월드컵, 첫 도전은 3번의 시련이었다. 조별리그 첫경기인 브라질전에서 0대3으로 완패한 후 프랑스(0대1패) 노르웨이(1대7패)에 연패했다. 12년전 열일곱살 막내로 이 대회에 나섰던 '골잡이' 박은선은 "얼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김)진희 언니가 골 넣었던 기억, 내가 엄청 골을 퍼내던 기억만 난다"고 했었다. 12년만에 대한민국 여자축구는 놀라운 성장세를 세계 무대에 입증했다. 12년전과는 달랐다. 거침없는 패기와 열정으로 12년만의 월드컵에서 값진 첫승, 새 역사를 썼다. "대~한민국" 함성이 울려퍼졌다. "우리 선수들의 땀과 눈물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던 윤덕여 감독의 말이 현실이 됐다. 오타와는 대한민국 여자축구의 성지가 됐다.
남자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첫승을 거두는 데는 무려 48년이 걸렸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 이후 1998년 프랑스월드컵까지 대회 본선에서 4무10패를 기록했다. 48년의 기다림 끝에 2002년 6월 한일월드컵에서 폴란드전에서 첫승을 거뒀고, 포르투갈전에서 16강 기적을 썼고, 4강 신화까지 이뤘다. 12년만에 꿈을 이룬 후 '윤덕여호 캡틴' 조소현이 말했다. "12년만의 승점 1점도 자랑스럽지만, 첫승 16강은 정말 자랑스럽다. 4강? 이번에 할수도 있지 않을까?우리 팀을 보면 분위기에 많이 좌우된다. 내일, 모레, 준비과정을 보면 느낌이 올 것같다"며 웃었다. "이번 월드컵 조별예선 3경기에서 최악의 상황까지 왔었다.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조2위로 16강에 간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우리는 패하면서 배웠고, 비기면서 '끝난 게 아니라''1승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처음부터 이겼다면 스스로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지고, 비기고, 이기는 과정이 우리가 배우기엔 좋았다고 생각한다."
오타와(캐나다)=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